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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시경석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378
한자 焚黃時慶席韻
영어공식명칭 Boonhwangsi Gyeongsuk un
이칭/별칭 「분황할 때 경축연에서 지은 시」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727년 - 「분황시경석운」 저자 이의조 출생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799년연표보기 - 「분황시경석운」 창작
저자 몰년 시기/일시 1805년 - 「분황시경석운」 저자 이의조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814년 - 『북곽실기』에 「분황시경석운」 수록되어 필사본 간행
배경 지역 서명보 효자각 -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7길 9[산격동 1134-1]지도보기
성격 한시|칠언율시
작가 이의조

[정의]

조선 후기 대구 지역 출신인 효자 서명보가 사후 벼슬이 추증되면서 분황할 때 1799년 경축연에서 이의조가 지은 한시.

[개설]

서명보(徐命普)[1704~1778]의 본관은 달성(達城)이고, 자는 화극(華極)이며, 호는 북곽(北郭)이다. 아버지는 서익지(徐翊祉)이고, 어머니는 오산김씨(鰲山金氏) 김억추(金億秋)의 딸이다. 서명보는 타고난 성품이 온화하고 인자하며 효성스럽고 근신하였다. 일곱 살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아버지가 중풍에 걸린 이후에는 사망할 때까지 아버지의 병환을 돌보았다. 대구 지역 유생(儒生)과 암행어사, 관찰사가 계장(啟狀)을 지어 올려 1799년 통훈대부 공조좌랑(通訓大夫工曹佐郎)에 특별히 추증되었고, 1841년 정려(旌閭)를 하사받았다. 서명보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출신이다. 저서로 『북곽실기(北郭實記)』가 있다.

「분황시경석운」은 1799년 9월 12일 서명보가 사후 벼슬이 추증되면서 분황할 때 경축연에서 이의조(李宜朝)[1727~1805]가 지은 한시이다. 분황(焚黃)은 죽은 이에게 벼슬이 추증되면서 조정에서 내려온 사령장(辭令狀)과 황색 종이에 쓴 부본(副本)을 자손이 선조의 무덤에 고하고 부본을 태우는 의식을 말한다. 『북곽실기』에 58개의 칠언율시와 1개의 칠언배율, 1개의 오언고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의조가 고유문(告由文)을 작성하였고, 「분황시경석운」의 첫 번째 수를 지었다. 이의조의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자는 맹종(孟宗)이며, 호는 경호(鏡湖)이다. 이재(李縡)[1680~1746]와 송능상(宋能相)[1710~1758]의 문인이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하였다. 자신의 학문적 기반을 바탕으로 저술 활동뿐만 아니라, 방초정(芳草亭)을 교육장으로 활용하여 후진 양성에도 전력하였다. 아버지의 유명을 따라 『가례증해(家禮增解)』를 완성하였다. 조정에서 공릉참봉(恭陵參奉)을 제수하였지만 사양하였고, 다시 첨중추오위장(僉中樞五衛將)을 제수하였다.

[구성]

이의조의 「분황시경석운」서명보 분황 경축연에서 지은 60개 시 중에 첫 번째에 자리하고 있는 칠언율시이다.

[내용]

백년공의구유명(百年公議久愈明)[백 년 동안 공의는 오랠수록 더욱 분명하여]

성대숭포혁혁성(聖代崇褒赫赫聲)[성스러운 시대에 높은 포상이 빛나게 울렸네]

향리쟁칭위자효(鄕里爭稱爲子孝)[향리에서는 자식의 효성을 다투어 칭송하며]

금어유감격천성(禽魚猶感格天誠)[새와 물고기조차 감응하고 하늘까지 이른 효성이네]

일심도회유겸덕(一心韜晦由謙德)[한마음으로 감춘 것은 겸손한 덕에서 말미암고]

만고강상앙성명(萬古綱常仰盛名)[만고의 영원할 강상은 성대한 이름을 우러르네]

최한승은신후만(最恨承恩身後晩)[가장 한스러운 것은 은전이 돌아가신 뒤에 내린 일]

명명신리역지영(冥冥神理亦知榮)[저승에서 신들도 또한 영광을 알겠도다]

[특징]

「분황시경석운」은 ‘경(庚)’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칠언율시이며, 59개의 칠언시는 ‘명(明)’, ‘성(聲)’, ‘성(誠)’, ‘명(名)’, ‘영(榮)’으로 운자를 통일하였다. 다섯 작품은 시서(詩序)를 포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분황시경석운」은 총 60명이 참여하여 작시(作詩)하였는데, 실제 분황 경축연에 참석한 인사는 60명을 능가하였을 것이다. 지역 사회에서 효행으로 칭송을 받은 서명보의 명성과 당대의 교유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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