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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조춘여서행보, 최강후계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6343
한자 南山早春與徐行甫, 崔康侯溪行
영어공식명칭 Walk along the stream in the spring with Seo Haeng-bo and Choi Kang-hoo
이칭/별칭 남산의 이른 봄 서행보, 최강후와 함께 시내를 거닐며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79-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영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53년 - 「남산조춘여서행보, 최강후계행」 저자 손처눌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34년 - 「남산조춘여서행보, 최강후계행」 저자 손처눌 사망
편찬|간행 시기/일시 1784년 - 「남산조춘여서행보, 최강후계행」 저자 손처눌 『모당집』 간행
배경 지역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산79-4]지도보기
성격 한시|오언율시
작가 손처눌

[정의]

조선 후기 대구의 청호서원에 제향된 손처눌서사원최흥국을 만나 봄의 남산을 노닐며 지은 한시.

[개설]

「남산조춘여서행보, 최강후계행(南山早春與徐行甫, 崔康侯溪行)」을 쓴 손처눌(孫處訥)[1553~1634]은 본관이 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이고, 호는 모당(慕堂)이다. 아버지는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 이탄(李坦)의 딸이다.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장현광(張顯光), 서사원(徐思遠), 곽재겸(郭再謙), 유요신(柳堯臣) 등과 교유하였다. 학문과 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구 지역 인사들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을 조직하여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서사원과 함께 대구 지역의 강학 활동에 힘써 대구 문풍(文風)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연경서원, 선사재 등에서 강학하였다.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청호서원(靑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1784년 간행된 『모당집(慕堂集)』이 있다.

최흥국(崔興國)의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강후(康候)는 자이다. 양산 출신의 의병장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서사원(徐思遠), 손처눌 등과 더불어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 참가하였다. 서사원(徐思遠)[1550~1615]은 본관이 달성(達城)이고, 자는 행보(行甫)이며, 호는 낙재(樂齋) 혹은 미락재(彌樂齋)이다.

「남산조춘여서행보, 최강후계행」손처눌이 이른 봄에 서사원최흥국을 만나 남산[현 대구광역시 남구 앞산 일대]을 노닐며 지은 한시이다. ‘남산의 이른 봄 서행보, 최강후와 함께 시내를 거닐며’라는 의미이다.

[구성]

「남산조춘여서행보, 최강후계행」는 오언율시이다.

[내용]

간고림전무(澗古林全茂)[옛 시내에 숲이 완전 무성하고]

산고운반요(山高雲半腰)[높은 산 구름 산허리에 걸렸네]

풍천고적안(風穿枯荻岸)[마른 갈대 언덕으로 바람 훑고]

인과석양교(人過夕陽橋)[석양지는 다리로 사람 지나네]

일난소감채(日暖蕭堪採)[날 따뜻해져 쑥 캘 만하지만]

춘음설미소(春陰雪未消)[봄 그늘에는 아직 눈 그대로 있네]

수음수처작(隨吟隨處酌)[가는 곳마다 술 마시며 시 읊다가]

불각로장요(不覺路將遙)[갈 길 아직 먼 것을 깨닫지 못하네]

[특징]

「남산조춘여서행보, 최강후계행」은 소(蕭) 계열의 운목이 사용된 오언율시이다.

[의의와 평가]

「남산조춘여서행보, 최강후계행」은 한가로운 정서가 작품 전체에 흐른다. 창작 시기를 특정할 수는 없으나 시어와 한가로운 정서 속에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으로 볼 때, 임진왜란 후 생사고락을 함께한 벗을 다시 만나 지은 시인 듯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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