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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5875
한자 官服
영어공식명칭 Gwanbik|Official Robe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심도희

[정의]

대구 지역 출신 문무백관이 정복으로 입었던 의복.

[관복의 종류]

관복은 문무백관(文武百官)이 정복으로 입었던 의복이다. 조선시대의 남자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나랏일을 하는 관리가 되면 품계와 의례의 종류에 따라 정해진 관복을 입었다. 관복의 종류에는 조복(朝服), 제복(祭服), 상복(常服)이 있다. 조복은 왕실의 경축일이나 조칙을 발표할 때 혹은 중요한 자리에 문무백관이 입고 참가하는 옷이다. 제복은 종묘사직에 제사할 때 착용하는 것으로 조복과 구성이 같으나 옷의 색상과 장신구가 다르다. 상복은 평상시 집무할 때 착용한다. 이 외에 공무 집행 시에 입었던 공복(公服), 상복보다 간략화된 집무복인 시복(時服), 문무관이 왕의 행차를 수행할 때나 외국에 사신으로 파견될 때, 국난을 당하였을 때 입었던 융복(戎服), 구군복(具軍服)이라 불리는 군복, 평상시에 입는 편복(便服) 등이 있다.

[관복과 신분 질서]

조선 전기에 간행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에는 왕실을 비롯하여 각 사회적 신분에 따라 상세하고 엄격하게 복식을 규정하였으니, 이는 조선시대의 통치 이념인 유교의 예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사모관대(紗帽冠帶)가 대표하는 관복은 사모(紗帽), 단령(團領), 흉배(胸背), 대(帶), 화(靴)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러한 형식은 조선시대 1426년(세종 8)에 완성되었다. 관복은 시대나 착용자의 품계에 따라 색과 모양이 달랐으니,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 질서가 반영된 것이다. 초기의 관복은 대로써 품계의 상하를 표시하였으나, 1454년(단종 2) 이후부터는 흉배로 상하를 구별하였다. 흉배는 일반적으로 기린, 학, 호랑이, 큰곰, 해치 등의 문양을 품계에 따라 달리 사용하였다. 조선시대 대구 지역에서도 동일한 기준으로 관복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사우(黃士祐)가 쓴 『재영남일기(在嶺南日記)』에는 1519년 4월 2일 경상도관찰사 문근(文瑾)이 부임할 때 도사 황사우가 조복 차림으로 교서를 맞이하고 찰방 등은 흑단령(黑團領) 차림으로 의식 절차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현황]

조선 전기 관복의 초기 형태는 고려시대의 단령과 같았으나, 조선 후기가 되어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계기로 조선시대 복식이 변화하면서 관복에도 변화가 일어났으니, 단령의 깃이 깊게 파이고 소매와 고름이 커졌으며 흉배는 작아졌다. 개항기 이후에는 의복제도의 개혁에 의하여 관복은 급변하였다. 개항기에 서양의 신문명을 받아들이면서 관복이 간소화되고 단발령이 반포됨에 따라 무관복은 구미식 군복으로 바뀌었고, 문관복은 서양식 복장으로 변하였다. 관복이 양복으로 바뀌면서 우리 고유의 한복도 같이 변천을 겪게 되었다. 현대의 대구광역시에서는 전통 혼례로 결혼식을 올리는 신랑의 혼례복으로 관복인 단령이 쓰이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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