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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운동협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5173
한자 大邱運動協會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성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2년 3월 23일연표보기 - 대구운동협회 설립
최초 설립지 청년회관 -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지도보기
주소 변경 이력 조양회관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현 소재지 조양회관 -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지도보기
성격 체육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었던 청년 체육을 보급·발전시키기 위한 단체.

[설립 목적]

대구운동협회는 일제강점기 일본인 체육인들에게 대항하여 자주정신을 바탕으로 설립된 체육단체이다. 대구청년회의 회원들은 억압과 착취 속에서도 자주적으로 대구의 스포츠 행사를 기획하고 경기를 개최하고자 대구운동협회를 창립하였다.

[변천]

대구운동협회는 1920년에 조선체육회가 출범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생겨난 지역 체육회의 하나로 발족하였다. 1922년 3월 23일에 청년 실업가 박기돈을 초대 회장으로 하여 엄성문·윤용기·양규식·송기찬·남정구·차성호 등의 인물이 발기하여 창립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운동협회는 조선에서 스포츠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을 무렵부터 스포츠 활성화를 위하여 공격적으로 대회를 개최하였다. 지금의 스포츠란 경기를 거듭하며 선수들의 역량을 쌓고 경기력을 향상하는 것이 목표라면 이 시기의 스포츠는 그저 관중을 많이 모아 규모를 크게 하는 것에 의의를 두었다.

대구운동협회가 주최한 첫 종합 대회는 ‘대구춘기대운동회’였다. 대구운동협회는 첫 종합경기의 명칭에 대운동회를 사용하고 싶었으나, 당시 일본계 신문사인 『조선민보』가 이미 시민대운동회라는 명칭의 운동경기를 개최하고 있었으므로 시민대운동회에 대항하여 ‘대구춘기대운동회’라 이름을 지었다. 『대구체육사』는 대구춘기대운동회에는 일본인 선수는 거의 없고 대부분의 관중과 선수가 조선인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또 다른 사업으로는 ‘전조선정구대회’가 있다. 일제에 저항하는 단체들이 활발히 활동하면서 일제의 억압이 차츰 심해지자 대구운동협회의 활동도 위축되기는 하였지만 대구운동협회의 이러한 노력으로 대구는 정구의 도시로 탄생할 수 있었다.

[현황]

대구운동협회의 첫 종합 체육대회이자 조선인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대구춘기대운동회는 1935년 제9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일본이 세계대전을 준비하면서 기존의 스포츠 경기도 군사력 훈련을 위한 국방 경기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스포츠 경기들이 하나둘 폐지되었고, 대구운동협회는 변화의 필요성을 느껴 발전적 해체 단계에 이르렀다. 대구운동협회의 해체 이후 생겨난 단체가 영남체육회이다.

[의의와 평가]

대구운동협회의 등장은 대구 부민들에게 스포츠에 대한 인식을 심어 주었을 뿐 아니라 스포츠 활동을 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에 민중이 합법적으로 분노를 표출할 수 있었던 것은 스포츠였다. 관중은 스포츠란 명목하에 함께 모여 외치고, 선수들은 온 힘을 다하여 싸워 이길 수 있었다. 대구운동협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훗날 대구는 정구의 도시라 불릴 수 있었으며, 스타플레이어의 탄생과 더불어 체육인들이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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