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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야구연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5171
한자 大邱野球聯盟
분야 문화·교육/체육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성범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6년연표보기 - 대구야구연맹 결성
성격 체육단체

[정의]

대구광역시에 있었던 영남체육회 소속 야구 단체.

[설립 목적]

대구야구연맹은 해방 이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모임과 회합이 가능하여지자 본격적으로 스포츠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구성하게 되었다. 스포츠 열풍으로 학교마다 창단된 야구부가 주를 이루었으며, 남전·금련·조방·조운·전매국 등 5개의 직장 팀도 소속되었다.

[변천]

대구야구연맹은 다른 스포츠보다도 선수들이 많았기 때문에 금방 연맹을 결성할 수 있었다. 가장 많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고 실력도 좋았던 을유구락부가 연맹 가입을 거부하면서 어려움도 있었지만, 대구야구연맹은 무사히 결성되어 영남체육회 산하의 체육단체가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야구연맹은 당시 야구의 엄청난 인기로 학교마다 신설되었던 야구부에 지도자의 역할로 선수들을 파견하여 야구부원을 훈련시키는 사업을 펼치는가 하면, 1946년 6월 조선체육회가 개최한 도시 대항 야구대회에 투수 고광적, 포수 이종대, 1루수 윤재준, 2루수 편순윤, 3루수 김보상, 유격수 임형관, 좌익수 허혼, 우익수 박춘등 등으로 팀을 짜 내보내기도 하였다. 이때 대구팀은 강호 인천팀과의 대결에서 8대 7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도시 대항 야구대회가 있은 직후 대회본부는 지역 팀별로 우수한 선수를 뽑아 국가대표팀을 구성하였고, 대구팀에서는 윤재준과 고광적이 선발되어 미 주둔군과 친선경기를 펼치기도 하였다.

[현황]

대구야구연맹은 야구가 인기 종목이었던 덕분에 비교적 빨리 경기단체를 결성할 수 있었으며, 광복 이후 경기종목의 조화로운 발전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며 축구와 육상 등 인기 종목뿐 아니라 비인기 종목에서도 경기단체를 결성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또 직장인과 학교를 중심으로 빠르게 결성되었던 야구 팀들을 하나로 모아 체계를 구축하였으며, 학교 야구부에 지도자를 파견함으로써 야구 보급의 주역이 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야구연맹은 오늘날 야구의 도시 대구를 전 조선에 알리는 데 일등공신인 단체였다. 해방 직후 열린 전국체육대회에서도 야구로 팀을 결성할 수 있었을 정도로 대구는 실력이 출중한 선수를 많이 보유하고 있었고, 대구의 선수들을 국가대표까지 만들 수 있었던 이유도 대구야구연맹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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