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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660
한자 聖潔敎
영어공식명칭 Holiness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병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5월 2일 -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설립

[정의]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는 완전주의적 입장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신교 교파.

[개설]

성결교는 그리스도와 그 사도들의 전통에서 시작되었다. 사도들의 전도와 선교는 요한 웨슬리의 성결 운동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결교의 완전주의적 입장이란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에서 모두 자유로울 수 있어야 완전하게 성결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회심을 중요하게 여기며, 근본주의적 신앙 형태를 지닌다.

성결교는 교리적으로 ‘웨슬리 신학’에 기초하고 있다. 웨슬리가 활동하던 18세기 영국 교회의 상황은 영적 고갈이 심각하였다. 웨슬리는 1735년 북미의 식민지 조지아로 선교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1738년 5월 24일 모라비안파의 수양회에 참석하였다가 중생과 성결을 체험하였다. 웨슬리는 1738년 이후 1751년까지 25만 마일 이상 전국 순회 전도를 다녔고, 4만 2400번의 설교를 하면서 부흥 운동을 주도하였다. 웨슬리의 부흥 운동은 온전한 성화와 기독인의 완전에 대한 교리를 강조하는 성결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성결 운동은 1830년대에 일어난 팔머(Phoebe Palmer)의 성결 운동을 통하여 확장되었다. 팔머의 집에서 열린 ‘화요성결집회’에서 수많은 성결 지도자를 배출하였으며, 1867년에 일어난 ‘전국성결촉진캠프집회연합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1885년에는 여러 성결 단체들이 모여 ‘제1회 성결총회’가 열렸으며 성결교 운동이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1897년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 국제성결연합과 기도연맹[International Holiness Union and Prayer League]이 창설되었다. 이것이 순례성결교회(Pilgrim Holiness Church) 교단이다. 그러나 1893년에서 1900년 사이에는 무려 23개의 성결 교파들이 형성되었지만, 1901년 ‘제2회 성결총회’에서는 감리교가 분리하여 나왔다. 이후 냅과 리스(Seth C. Rees)에 의하여 만국성결연맹이 재정비되어 1913년에 만국성결교회가 창립되었다. 만민성결교회는 웨슬리의 성결 운동을 계승하여 선교 중심적 교회, 교회 갱신과 초대교회 회복 운동, 그리고 사중복음[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특징으로 한다.

[한국의 성결교]

1901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된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는 카우만(Charles E. Cowman)과 킬보른(Ernest Albert Kilbourne)이 중심이 되어 일본에 있는 몇 개의 성결 단체를 하나로 묶어 3개의 성결 단체 대표 8명이 ‘성결 연맹’을 결성하여 창립되었다.

1904년 일본복음동맹회는 아시아의 개화와 복음 전파를 위하여 한·일 두 나라의 기독교가 서로 협조하여야 한다는 목적 아래 감리교의 혼다 목사와 성결 운동의 대표적 지도자인 나카다 쥬지 목사를 한국에 파송하였다. 나카다는 한국에 도착하여 전형적인 성결 운동의 직접 선교 방법인 개인 선교와 노방 선교를 시작하였다. 나카다는 전도 여행을 통하여 토착 사역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김상준(金相濬), 정빈(鄭彬)을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에 입학시켰다. 1907년 5월 2일 김상준, 정빈이 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서울에 도착하여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東洋宣敎會福音傳道館)이 세워지면서 한국동양선교회가 시작되었다. 1921년 9월에는 전국 33개소의 교회와 기도처를 통괄할 교회 조직이 요구되어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는 명칭으로 교단이 형성되었다.

1912년에는 무교동에 80평[264.46㎡] 규모의 적벽돌로 성결교회 최초의 성전이 건축되었다. 1914년 4월 21일 최초로 김상준, 이장하, 이명직, 강태운, 이명헌 등이 목사 안수를 받았고, 1921년까지 전국에 34개 교회가 설립되었다.

1921년 9월에는 복음전도관을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감독제에서 고문제로 조직 운영을 변경하였다. 1924년에는 고문제에서 이사회로 개정하였다. 1923년 교역자 회의에서는 이사회에 조선인 이사를 둘 수 있도록 결의하였다. 실질적으로 교단을 운영하는 주체는 이사회였다.

1932년 제4회 연회 결의에 따라 1933년 4월 11일부터 16일까지 경성성서학원 대강당에서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 임시 약법’이 제정되어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1935년 제3회 총회는 분열 총회가 되었다. 또한 감독 정치에서 의회 정치로 전환되었다. 이사회는 1940년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경성에서 제1회 임시총회 및 연회를 소집하였다. 총회의 구성은 일제의 자립 정책 강요와 동양선교회의 자급 정책, 국민 총력 전도 운동에서 비롯되었으나, 1943년 12월 31일 성결교회는 해산되었다. 1945년 11월 9일 성결교회 제1회 재흥총회를 서울 경성신학교 강당에서 재흥준비위원회가 교단적으로 회집하였다. 재흥총회 모임에서 성결교회는 민족독립교회를 표방하여 교단 명칭을 ‘기독교조선성결교회’로 변경하였다.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확정되면서, 1949년 4월 제4회 총회에서 성결교의 정식 명칭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로 변경하였다.

[대구 지역의 성결교]

대구 지역의 성결교는 1923년 3월 조선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이사회에서 파송된 경북 지방 감리 목사 박형순 목사가 참석한 경성총회 본부의 고문회의에서 대구부에 대구성결교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면서 1923년 6월 26일 대구성결교회[현 봉산교회]가 설립되며 시작되었다. 1933년 영남지방회가 창립한 후 1945년 11월 19일 영남교구회를 창립하였으나, 일제에 의하여 교단이 해산되었다. 1949년 총회 결의에 따라 교구회 제도는 지방회로 변경되면서 영남지방회가 시작되었다. 이후 영남지방회는 경북지방회와 경남지방회로 분할되고, 경북지방회는 경북지방회와 경북서지방회로 분할되었으며, 1993년 경북지방회는 다시 경북지방회와 대구지방회로 발전적인 분할을 이루었다.

2020년 기준, 대구 지방은 5개 감찰로 조직되었으며, 1923년 대구성결교회를 시작으로 1951년 중앙교회, 1946년 향촌동교회, 1953년 동인교회[현 대광교회], 1953년 중앙교회, 1954년 대봉교회, 1955년 대덕교회, 1968년 충신교회, 1974년 삼일교회, 1974년 서대구교회, 1980년 시민교회, 1980년 한샘교회, 1984년 동광교회, 1985년 수성교회, 1981년 성진교회, 1988년 와보라교회[현 대민교회], 1989년 동촌교회[현 대구사랑교회], 1990년 활천교회, 1990년 신광교회[현 반석교회], 1990년 소망교회, 1990년 산돌교회, 1991년 소명교회, 1991년 평강교회, 1993년 복된교회, 1994년 성민교회, 1994년 행복한교회, 1999년 기쁨교회, 2005년 포도나무교회, 2006년 주는교회, 2006년 예일교회 등이 설립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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