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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이용사노조 파업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4071
한자 大邱 理容師勞組 罷業
영어공식명칭 Daegu Barber Workers' Union Strike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노광

[정의]

1958년 1월 13일에 있었던 대구 지역 이용사노조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노동쟁의.

[개설]

대구 시내에 산재한 280여 개 이발관 종업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대한노총 대구지부 이용사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1957년 말부터 사용자 측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하여 교섭을 벌여 왔으나 사용자 측이 불응하여 단체교섭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었다. 1958년 1월 13일 대구 지역 이용사노조는 대구 노총회관에서 대의원 대회를 개최하고 요구조건을 내걸며 쟁의를 제기하기로 결정하였다. 요구조건은, 업주 6할, 종업원 4할의 수입 배분 비율을 5대 5로 할 것, 노동시간을 여름과 가을에 11시간으로 단축할 것, 매월 11일과 22일을 정기 휴일로 정할 것 등이었다. 이용사노조는 요구사항을 사용자 측에 제시하는 한편 경상북도 당국에 쟁의 발생을 신고하였다.

[역사적 배경]

1948년 7월 17일 헌법이 제정되면서 노동3권과 이익균점권을 보장하였고, 1953년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이 만들어져 노동법 시대를 열었다. 6·25 전후 대한노총은 자유당의 기간단체화가 되었는데, 1959년 이에 반기를 들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가 선명 노동운동을 제창하며 생겨났다.

[경과]

대구 이용사노조는 냉각기간 만료일인 1958년 2월 12일까지도 사용자 측이 아무 반응이 없자 긴급대책 위원회를 소집하여 협의하였다. 태업을 단행하지 않고는 사용자 측의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1958년 2월 15일 오전 7시를 기하여 태업을 단행한다는 결정을 모든 사용자들에게 통고하였다.

2월 15일 음력 정월을 앞둔 대목에서 대구 시내 대부분의 이발관이 일제히 태업에 돌입하자 사용자 측은 물론 시민들까지 어리둥절하였다. 그날 낮 몇 개 업소에서는 경찰이 개입하여 태업이 중단된 곳도 있었으며, 또 주인이 직접 이발을 하는 곳, 업주가 다른 사람을 채용하여 일을 시키려는 곳 등이 있어 태업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노조 측은 분산되어 있는 280여 개 이발관의 태업을 유지하기 위하여 6개 반으로 감찰대를 편성하였으며, 쉴 새 없이 행동 통일을 호소하고 다녔다. 쟁의 중에 다른 이발사를 고용하여 영업 행위를 하려는 부당노동행위를 막기 위하여 일부 조합원들은 이발 의자에 앉은 채 버티기도 하였다. 경상북도는 이용사 태업 사태가 벌어지자 노사 간 알선에 힘썼지만 쌍방의 의견 차이로 음력 섣달 그믐의 대목도 별 수 없이 태업 상태로 넘어갔다.

경상북도는 노무위원회에 사건의 해결을 의뢰하였다. 경상북도 노무위원회는 대구 고등법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변호사, 학자, 사용자 위원 각 1명과 근로자 위원 2명으로 구성하여, 2월 22일 오전 10시부터 무려 5시간 동안 회의를 열어 노사 쌍방 대표를 설득하였다. 마침내 오후 3시 노사 쌍방이 조정안에 합의함으로써, 8일 간에 걸친 이용사 태업은 끝을 맺었다.

[결과]

노무위원회의 중재로 노사 쌍방이 합의한 내용은, 임금은 현행대로 지급할 것, 노동시간은 종래보다 30분씩 단축할 것, 공휴일을 월 2회에서 월 3일로 할 것, 사용자는 일방적인 해고를 하지 않고 단기간에 노사협의회에 통고할 것 등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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