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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성금융조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3923
한자 達城金融組合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박노광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8년연표보기 - 달성금융조합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56년 5월 1일연표보기 - 농업은행 설립
개칭 시기/일시 1958년 4월 1일연표보기 - 농업은행에서 농업은행 대구지점으로 개편
개칭 시기/일시 1961년 8월 1일연표보기 - 농업은행 대구지점에서 중소기업은행으로 개편
성격 협동조합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었던 금융 기관.

[개설]

1907년 5월 30일에 「지방금융조합규칙」과 「지방금융조합설립에 관한 건」의 공포에 따라 지방 소농민의 금융 이용을 돕고 농업 개발을 촉진하기 위하여 금융조합이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방침에 따라 1908년에 달성금융조합이 설립되어 농민, 중소 상공인, 시민을 조합원으로 삼아 소액의 농업 자금을 제공하였다.

[설립 목적]

지방금융조합의 설립은 조선 경제가 식민지 경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를 위하여 대한제국 재정고문인 메가다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화폐정리사업과 재정 기구 개편에 착수하자 전통적인 조선 금융 기구가 붕괴하고 금융경색이 전국적으로 확산하였다. 지방금융조합은 농공은행을 보조하여 농촌의 금융경색을 완화하고, 당시 확산하고 있던 의병 투쟁을 조선 농촌 및 농민으로부터 분리·차단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변천]

지방금융조합은 농공은행의 보조기관으로 설립된 이후 사업 측면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기구 측면의 개선이 따르지 못했다. 한일병합 이후 착취 체제의 확립을 위하여 실시한 화페정리사업과 토지조사사업 그리고 토지의 자금화를 목적으로 하는 부동산 등기가 완료되면서 농촌이 강력한 상품경제로 들어서게 되었다. 대구 지역도 근대적인 상업시설이 들어서면서 시장이 커지고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따라서 농민만이 아니라 도시의 상공인들에게도 자금이 필요하였지만, 도시에서 중소 상공업자에 대한 융자가 미흡하였으므로 일본인들의 원성을 사게 되었다. 또 농민에 대한 여신 지원도 오래가지 못하여 한계에 부딪혀 수탈의 원천인 농업생산성마저 더는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에 일제는 1918년 6월에 「지방금융조합령 개정에 관한 제령」을 발포하면서 도시금융조합의 설치를 허용하고 각 도 단위로 금융조합 간의 자금 과부족을 조정하는 금융조합연합회를 설립하였다. 조합원의 자격도 농민에만 한정되었던 것을 중소 상공업자들도 조합원이 될 수 있도록 확대하였다. 이처럼 금융조합은 도시와 농촌에 설치하여 일제의 식민지 금융정책에 의하여 운영되는 금융기관이면서 일제의 조선 지배 방침에 따라 작동되는 식민지배기구의 말단 조직이었다.

1926년 말 기준 대구 지역의 금융 추이를 살펴보면 은행[7개]은 예금고 88만 원, 대출고 212만 원인 반면 금융조합[4개]은 예금고 175만 원, 대출고 73만 원이었다. 1936년에는 은행[6개]이 예금고 1520만 원, 대출고 2342만 원이며 금융조합은 예금고 400만 원, 대출고 192만 원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은행은 대출고가 예금고를 상회하였고, 금융조합은 예금고가 대출고를 상회하였으므로 정책적으로 한일 간의 금융상의 차별이 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금융조합이 예금으로 모은 자금이 대구의 중소업자에게 대출되지 않고 농촌으로 흘러들어가 농민을 수탈하는 고리대금으로 전용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달성금융조합은 그 후 몇 차례 변신을 거듭하게 된다. 1956년 5월 1일에 금융조합제도가 폐지되고 「농업은행법」에 의거하여 농업은행으로 개편되었으며, 1958년 4월 1일 「특수농업은행법」에 따라 농업은행 대구지점이 되었다. 1961년 8월 1일에는 「중소기업은행법」에 의거하여 중소기업은행이 되었다. 이처럼 금융조합은 농업협동조합과 통합하여 종합농업은행이 되었고, 일부는 중소기업은행으로 분리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달성금융조합은 농공은행의 보조기관으로 발족하였으며, 정부에 의한 무이자 또는 저리 자금의 교부를 통하여 자금을 조성하고 정부가 임명하는 일본인 파견 이사의 감독하에 직접 정부 사업을 맡기도 하였다.

[현황]

1942년 기준 달성금융조합의 예금고를 살펴보면 예금 총액 96만 43원이며, 그중 정기예금이 42만 3551원[44.1%]으로 가장 높고, 저축예금 30만 3770원[31.6%], 관공예금 18만 4190원[19.2%], 정기적금 5만 5108원[2.6%], 거치예금 6,038원[2.4%] 순으로 나타났다. 달성금융조합의 대출금을 살펴보면 총대출금 43만 2697원으로 나타났다. 용도별로 구분하면 농업 부문이 41만 8767원[96.8%]으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상업자금 7,787원[1.8%], 기타 6,143원[1.4%] 순으로 나타났다. 달성금융조합은 촌락조합이므로 이처럼 농업 자금의 비중이 높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달성금융조합은 1930년대에도 꾸준히 성장하였다. 당시 대구부에는 대구금융조합, 대구서부금융조합, 달성금융조합, 그리고 달성동부금융조합 등 2개의 도시금융조합과 2개의 촌락금융조합이 있었으며, 이러한 금융조합들의 예금액은 7개 은행 예금액의 약 30% 정도였으나 대출은 7%로 매우 낮았다. 당시 달성금융조합은 서민금융의 역할을 담당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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