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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3035
한자 崔元澤
영어공식명칭 Choi Wontaek
이칭/별칭 석초(石樵),서상필(徐相弼),김성덕(金聲德)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5년연표보기 - 최원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월 - 최원택 대구청년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23년 6월 - 최원택 꼬르뷰로 국내부 대구 지역 야체이카 책임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5년 4월 - 최원택 조선공산당 창립대회 참석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최원택 화요파 공산주의자그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44년 11월 - 최원택 공산주의자협의회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53년 8월 - 최원택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선임
활동 시기/일시 1970년 - 최원택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선임
몰년 시기/일시 1973년연표보기 - 최원택 사망
출생지 수동 -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 지도보기
활동지 대구광역시 - 대구광역시
활동지 서울 - 서울특별시
활동지 일본 - 일본
활동지 중국 - 중국
성격 사회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대구청년회 집행위원장

[정의]

대구 출신의 사회주의운동가.

[개설]

최원택(崔元澤)[1895~1973]은 1895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대구청년회 활동을 시작으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및 조선노농총동맹 조사부 담당 상무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중국 만주로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남조선노동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석초(石樵)·서상필(徐相弼)·김성덕(金聲德)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최원택은 1920년 1월 대구청년회에 참가하였다. 남선 개발과 사회를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문화운동의 실행 기관을 자처하며, 5월 문사극(文士劇)을 개최하고 다수의 기부금을 조성하였다. 최원택은 1921년 6월 23일 경영난을 겪는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를 정상화하기 위한 후원회 조직에 참여하고 간사로 선정되었다. 8월에는 동아일보 대구지국의 지국장이 되었으며,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에 가입하여 1922년 4월 26일 정기총회에서 간사로 선출되었다.

최원택은 1923년 6월 꼬르뷰로 국내부 대구 지역 야체이까[세포] 책임자가 되었고, 사상단체 상미회(尙微會)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2월 서울에서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결성에 참여하고 3월 대구청년회 회장 자격으로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였으며, 대구에서 열린 남선노농총동맹의 창립대회에 참가하고 중앙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4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8월 24일 상미회의 총회에 참석하여 명칭을 정오회(正午會)로 바꾸었고, 상미회 총회에 이어 열린 대구청년회 임시총회를 통하여 ‘대중 해방’, ‘정의의 전위’ 등을 내세운 새로운 강령 채택을 주도하고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최원택은 1925년 2월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조선청년총동맹이 중심이 된 경북청년대회에 반대하여 안동에서 독자적으로 대구청년회 중심의 경북청년대회준비회를 발족시켰다. 이 일로 대구청년회는 조선청년총동맹으로부터 제명되었다. 3월에는 조선노농총동맹 조사부 담당 상무집행위원이 되었다.

이후 최원택은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조선총독부의 전조선민중운동대회 집회 금지 처분에 반발하여 일어난 이른바 ‘적기(赤旗)사건’으로 인하여 일본으로 건너가 11월 조선공산당 일본부의 초대 책임자가 되었다. 최원택은 1926년 5월 중국 만주로 파견되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조직에 참여하고 조직부장이 되었다가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으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최원택은 1928년 12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대전교도소로 이감 도중 대전역에서 “조선공산당 만세”, “조선민족해방운동 만세”를 외치며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징역 6개월이 가형되었다. 최원택은 1934년 9월 22일 6년 6개월의 형을 마치고 만기 출소하여 서울 계동에서 요양하였는데, 오랜 감옥 생활로 인하여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최원택은 1943년 화요파 공산주의자그룹 결성에 참여하여 위원이 되었고, 1944년 11월 공산주의자협의회에 참여하였다. 1945년 3월 건국동맹과 함께 결성된 군사위원회의 위원이 되어 노농군(勞農軍) 편성과 무장봉기를 준비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검거되었다. 이후 광복을 맞이하여 출소하였다.

최원택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벌이면서 서울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1945년 9월 미군정이 임명한 이범승 서울시장을 비난하는 선전문으로 인하여 미군정 경찰에게 체포되어 징역 11월과 벌금 1만 원형을 선고받았다. 최원택은 1946년 1월 7일 인민위원회·인민당·부녀동맹·청년총동맹 등의 인사들로부터 영접을 받으며 출소하였다.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를 위하여 월북한 뒤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정되었다. 최원택은 북한의 종파투쟁에서도 살아남아 1953년 8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1955년 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부위원장, 1958년 북소친선협회 중앙위원,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상무위원, 1970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을 지내다 1973년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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