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3001
한자 趙氣虹
영어공식명칭 Cho Gihong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세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3년 7월 24일연표보기 - 조기홍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8일 - 조기홍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19년~1922년 - 조기홍 대구 일대에서 독립운동 문건 배포
활동 시기/일시 1920년 7월 31일 - 조기홍 징역 1년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조기홍 관리 암살과 관공서 폭파를 도모하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조기홍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월형 언도
몰년 시기/일시 1945년 8월 2일연표보기 - 조기홍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조기홍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계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묘소 국립신암선열공원 제3묘역 - 대구광역시 동구 동북로71길 33[신암동 산27-1]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조기홍(趙氣虹)[1883~1945]은 1883년 7월 2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고, 이후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활동 사항]

조기홍은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가한 뒤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하여 잠적하였다. 12월에 대구 출신의 최익무(崔益武)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강태동(姜泰東)·이정래(李丁來)로부터 대한청년단 명의의 「적의 관공리(官公吏)인 동포에게」와 「남녀 학생에게(포고 제1호)」,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명의의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포고 제2호)」, 「독립축하가」라는 항일 문건을 전달받았다. 이후 조기홍최익무·서상하(徐相夏)·이종선(李鍾善)과 함께 이를 등사하여 대구 시내 각 학교와 상점 등에 뿌려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대한민보(大韓民報)』 수백 매와 격문 등을 평안도·전라도·경상도 등지에 배포하려고 준비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로 인하여 1920년 7월 31일 징역 1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조기홍은 1922년 출옥한 직후에도 대구에 거주하는 양한위(梁漢緯)와 함께 일제 관리 습격과 관공서 폭파를 계획하였으며,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대구 남문시장에서 폭탄을 제조하여 대구 남쪽 비파산(琵琶山)에 숨겨두고 기회를 노리던 중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계획이 좌절되었다. 조기홍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및 「총포화약류취체령」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6월형을 언도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조기홍은 이후에도 항일 의지를 굽히지 않고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43년 다시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1945년 8월 2일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조기홍의 묘소는 동구 신암동 산27-1 국립신암선열공원 제3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조기홍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