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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70
한자 全泰壹
영어공식명칭 Jeon Taeil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48년 8월 26일연표보기 - 전태일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56년 3월 - 전태일 남대문초등공민학교 2학년에 입학 후 중퇴
수학 시기/일시 1963년 3월 - 전태일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야간학교 전학 후 중퇴
활동 시기/일시 1966년 2월 - 전태일 통일사에 미상사로 취직
활동 시기/일시 1966년 10월 - 전태일 한미사에서 재단사로 근무
활동 시기/일시 1969년 6월 - 전태일 바보회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70년 9월 - 전태일 삼동친목회 조직
몰년 시기/일시 1970년 11월 13일연표보기 - 전태일 사망
출생지 남산동 -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 - 대구광역시 지도보기
묘소 마석 모란공원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2110번길 8-102[월산리 606-1]
성격 노동 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바보회 회장

[정의]

대구 출신의 노동 운동가.

[개설]

전태일(全泰壹)[1948~1970]은 1948년 8월 2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전상수(全相洙)와 이소선(李小仙) 사이에서 2남 2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전태일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950년 3월에는 부산, 1954년 8월에는 서울에 정착하여 천막촌에서 살았다. 가난으로 인하여 거의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1956년 3월 남대문초등공민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학교생활을 시작하였지만, 곧 그만두었다. 이후 남대문국민학교 4학년, 동광국민학교 6학년에 편입하였으나 결국 그만두었다.

1962년 1월 가족 모두 대구로 돌아와 큰아버지 댁에서 살면서 아버지 봉제 일을 도우며 대구복음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였다. 1963년 3월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현 대구명덕초등학교 체육관인 명덕관 자리] 야간학교로 전학하였지만, 아버지 일을 돕고자 학교를 중퇴하였다. 1964년 2월 서울에 가정부로 간 어머니를 찾고자 5세 막냇동생 전순덕을 데리고 무작정 상경하여 신문팔이와 구두닦이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1965년 8월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서울에서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이후 1970년 서울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하여 국내 노동운동뿐 아니라 한국의 학생운동,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활동 사항]

전태일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와 재봉 일을 해 생계를 유지하였다. 1965년 평화시장 삼일사에서 견습공으로 취직해, 첫 임금노동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6년 2월 미상사로 이직하였고, 1966년 10월 한미사에서 재단사로 승진하였다. 2년간 임금노동자로 일하면서 평화시장 노동자의 비참한 노동 현실을 인식하고 개선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전태일이 직장 생활을 했던 평화시장은 통일상가·동화시장과 함께 제조업체와 의류 상가가 밀집되어 있던 곳이었다. 약 500개 제조업체가 있었으며 모두 영세한 규모였다. 특히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에 시달렸다. 1967년 6월 근로기준법[법률 제286호, 1953년 제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 현실에서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

1969년 6월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았다. 바보회 회원들과 설문지를 만들어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을 조사하고, 노동자들에게 근로기준법의 내용을 알려 노동자의 권익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평화시장 노동자의 설문조사 내용을 기초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진정서를 작성하여 시청과 노동청에 제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69년 바보회는 경비 부족과 성과 미흡으로 더는 활동이 어려웠다. 전태일 역시 공장에서 해고되고 바보회 활동으로 인하여 더는 평화시장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건축현장에서 막노동하면서 생계를 이어 나갔다. 그때 심정을 「친구여.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라는 소설 형식의 글로 표현하였다.

1970년 9월 임마누엘수도원 건축 공사장에서 나와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여 다시 한번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노동자의 노동 조건에 대한 실태조사서를 작성하여 서울시청·노동청·동양방송 고발프로그램 등에 진정을 넣었다. 10월에는 『경향신문』 석간 사회면에 평화시장의 노동 실태를 담은 「골방서 하루 16시간 노동」을 기고하고, 서울시장과 면담 투쟁, 노동청에서 시위 투쟁을 이어 갔다.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근로기준법화형식을 열고자 하였으나, 경찰에 의하여 좌절되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면서 분신하였다. 전태일분신사건 이후 평화시장에서는 청계피복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전태일의 노동 정신을 이어받아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저술 및 작품]

1976년 대구 출신 조영래는 도피 생활을 하면서 전태일의 일대기를 담은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였지만, 국내에서 발간할 수 없었다. 1978년 11월 일본에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 『불꽃이여 나를 태워라-어느 한국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3년 전태일기념관건립위원회가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전태일 평전』[돌베개]으로 출간하였다. 1988년 전태일의 일기와 편지, 관공서·언론기관에 보낸 진정서 등을 묶어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돌베개]로 출간되었다.

[묘소]

전태일의 묘소는 마석 모란공원에 있다.

[대구 지역 전태일 추모식]

대구에서는 1970년 11월경 ‘전태일 열사 추도식’을 추진하였다. 여정남·임구호·정만기 등이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경북지부·가톨릭대학생연합회·기독교대학생연합회 회원과 연합하여 대구 반월당 소재 보현사 법당에서 ‘전태일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정보 형사들과 당국의 압력, 지도교수와 승려의 방해로 추도식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추도식 거행 전 「추도사」, 「500만 노동자에게 보내는 메시지」[여정남 기초], 「백만 학도에게 보내는 메시지」[임구호 기초], 「종교인에게 보내는 호소문」[여정남 기초]을 약 3,000부 인쇄하여 각 언론사와 대학에 배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4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되었다. 1988년 11월부터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를 매년 개최하여 전태일 정신을 기리고 있다. 1995년에는 박광수 감독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제작하였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2년 전태일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공식 인정하였다. 2005년 9월 30일 청계천에 전태일 기념상이 세워졌다. 2019년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이 개관하였다. 2020년 11월 전태일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전태일재단에서는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지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대구광역시에서도 2019년 3월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이 발족하여 전태일기념관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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