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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961
한자 張稷相
영어공식명칭 Jang Jiksang
이칭/별칭 하리모토[張元稷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3년연표보기 - 장직상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장직상 경상북도 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장직상 왜관금융창고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 장직상 왜관금융창고주식회사 대표이사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5년 7월 - 장직상 대구상업회의소 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34년 - 장직상 시중회 창립 발기인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4년 - 장직상 경북상공경제회 설립위원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46년 1월 - 장직상 남선전기회사 사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59년연표보기 - 장직상 사망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친일 반민족 행위자
성별 남성
본관 인동
대표 경력 중추원 참의

[정의]

근대 시기 대구 출신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

[개설]

장직상(張稷相)[1883~1959]은 1883년 장승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다. 일제강점기 대구를 대표하는 자본가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만주사변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자 친일 단체 시중회(時中會)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친일 활동을 하였다.

[활동 사항]

장직상은 1903년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을 시작으로 1904년에 감조관 산릉도감(監造官山陵都監), 1910년 6월에는 경상북도 신령군수가 되었다. 합방 직후 군수를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1910년 10월 다시 신령군수가 되었다. 일제의 무단통치 아래에서 1911년 비안군수, 1912년 하양군수, 1913년 선산군수 등을 지냈다. 또 일제의 1910년대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하여, 1915년 경상북도 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을 지냈다.

장직상과 형 장길상은 1920년 4월 경일은행(慶一銀行)을 설립하였다. 경일은행은 자본금 200만 원, 대주주 250명에 총 40,000주의 주식을 발행하였는데, 그 가운데 장직상이 약 2,500주, 장길상이 약 7,300주를 소유함으로써, 장씨 형제들이 총주식의 25%의 지분을 차지하였다. 1923년에는 주식 보유가 더욱 늘어났다. 장직상은 전무이사로 승진하였다.

장직상은 1920년에 왜관금융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대표이사가 되었고, 자본금 30만 원의 동아인촌주식회사 설립 및 고려요업주식회사의 경영에도 참여하였다. 1928년 남선양조사에 투자하여 이사가 되었고 1929년에 조양무진주식회사에 주주로 참여하였다. 장직상은 1933년 12월 경일은행선남은행에 합병되어 대구상공은행이 된 뒤 대구상공은행의 주식 700주를 보유하였다. 이후 경일은행 대신 오쿠라남선합동전기회사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영에 참여하였다. 1937년 주로 새끼, 가마니를 생산하는 경북산업주식회사의 대주주, 조선신탁회사의 이사, 경북화물자동차주식회사의 대주주로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장직상은 1923년부터 1924년까지 대구상업회의소의 특별평의원을 거쳐 1925년 7월 회장으로 선출되고, 1927년에 재선되었다. 대구상업회의소 회두에 재임 중 조선총독부에 조선산업개발의 위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장직상은 1931년부터 1940년까지 대구상공회의소의 특별회원으로 활동하고 1944년에는 총독부가 각도에 상공경제회를 설립할 때 경북상공경제회 설립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장직상은 1930년대 지방통치의 보조 수단이자 자문 기구 역할을 한 대구부회, 경상북도 도회 등 지방자치 기구의 의원으로서 정치 활동을 하였다. 1930년 6월부터 1942년까지는 조선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에서 주임관 대우의 참의로 있다가 1944년부터 일제 패망까지는 칙임관 대우의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우가키[宇垣] 총독의 두터운 신임을 얻기도 하였다.

장직상은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후 전쟁을 확대하면서 전시체제를 강화하자, 친일 단체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일제의 전쟁 정책을 수행하였다. 1934년 천도교의 최린 등이 신생활 수립, 신인생관 확립, 내선일가(內鮮一家)의 결성 등을 내세워 친일 단체 시중회(時中會)를 창립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40년 일제가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하리모토[張元稷相]로 이름을 바꾸었다.

장직상은 전시동원체제기인 1940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 겸 경제부 경제위원, 1941년 흥아보국단 경북도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1945년 대의당 당원, 대화동맹 심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또 충청북도 일원에서 학병 권유 연설을 하였다. 장직상은 막대한 재력으로 일제의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자진 기증하기도 하고, 또 대표적 친일 자본가 박흥식 등과 함께 가장 악질적 친일 단체인 대화동맹의 경비와 사업비를 담당하였다.

장직상은 해방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에 조선전기문화보급협회에 남선전기회사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1945년 12월 우익의 애국금헌성회에 참여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1946년 1월 군정청이 남선전기회사를 관리할 때, 장직상은 사장으로 활동하였고 1946년 3월 조선경제협의회의 감사, 대한생명보험회사의 취체역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정부 수립 후 특별법에 따라 반민특위가 구성되자 반민특위에 자수하였고,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러나 장직상은 진술서를 통하여 일제를 위하여 일한 적이 없다고 지속적으로 강변하였다. 장직상에 대하여 재판부는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또한 정부수립 후 농지개혁의 실시로 장직상이 소유한 토지 가운데 논 767만 3430㎡와 밭 22만 9092㎡가 피분배 면적의 대상이 되었으며, 대상 토지는 칠곡, 달성, 영천, 고령, 청도, 선산, 안동 등지에 퍼져 있었다. 이에 장직상의 소유 토지는 축소되었다.

장직상은 1959년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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