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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834
한자 李根澔
영어공식명칭 Lee Geunho
이칭/별칭 문옥(文玉),송은(松隱),규재(奎齋)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1년 7월 13일연표보기 - 이근호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06년 1월 - 이근호 교과서 및 잡지 인쇄 후원
활동 시기/일시 1906년 2월 - 이근호 경북관찰사 체임
몰년 시기/일시 1923년 3월 1일연표보기 - 이근호 사망
부임|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관료|친일파
성별 남성
대표 관직 경상북도관찰사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관료이자 친일파.

[개설]

[가계]

이근호(李根澔)[1861~1923]는 1861년 7월 13일에 태어났다. 자는 문옥(文玉), 호는 송은(松隱), 규재(奎齋)이다. 이근호의 동생은 이근택(李根澤), 이근상(李根湘)이다.

[활동 사항]

이근호는 1878년 3월 21일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1879년 훈련원 판관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889년 평안도 영변부사, 1896년 중추원의관, 내부위생국장을 역임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 결성 당시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98년 경무사, 법부협판을 지내면서 대한천일은행 부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근호는 1900년 농상공부협판, 1901년 충청남도관찰사, 1902년 전라남도관찰사, 1904년 경기도관찰사, 1905년 경상북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근호는 경상북도관찰사를 맡고 있는 동안 1906년 1월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가 설립되자, 교과서 및 잡지 인쇄를 후원하였다. 또 이전에 유생 김진수·김호규 등의 건의로 경북 41곳에 학교 설립을 계획한 바 있어 대구광문사와도 학교 설립 운동을 진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1906년 2월 이근호가 체임되면서 학교 설립 운동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근호를 이어 경상북도관찰사로 온 신태휴(申泰休)대구광문사와 함께 학교 설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1906년 3월 고종의 ‘흥학조칙(興學詔勅)’과 신태휴의 ‘흥학훈령(興學訓令)’이 발표되면서 대구를 비롯하여 경북 지역에 본격적으로 학교 설립이 이루어졌다.

1906년 4월 서울 광학사가 교육 진흥, 학교 설립, 학술 사업을 전국에 알리기 위하여 설립되었는데, 전 경상북도관찰사 이근호의 후원 아래 김호규·김진수와 같은 재경 영남 인사들이 주로 참여하였다. 또 1906년 8월 광학사의 대구지부로 대구광학회가 설립되었다. 대구광학회는 전임 관찰사 이근호와 연결된 대구·경북 일대 향리 계열의 중인 출신과 재경 대구 출신 유생들이 참여하였다. 대구광학회 역시 대구광문사처럼 흥학설교(興學設校)를 내세웠다.

이근호는 1906년 황실제도국총재(皇室制度局總裁)·제실재정회의의원(帝室財政會議議員)으로 역임하면서 대한제국의 황실 재산을 정리하였다. 1906년 4월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주는 훈2등 팔괘장, 5월에는 일제가 주는 훈1등 서보장, 9월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주는 훈1등 팔괘장을 받았다. 이근호는 ‘한일합병’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1910년 10월 7일 남작 작위를, 1911년 1월 13일 2만 5000원의 은사 공채를, 1912년 8월 1일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2년 12월 7일 종5위, 1918년 12월 20일 정5위를 받았다.

이근호는 1923년 3월 1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근호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친일파로 규정되어 있다. 2019년 광주광역시는 광주공원 내 사적비군에서 이근호선정비를 빼내 별도 공간에 설치하고 단죄문을 설치하였다. 2020년 전라남도 광양시는 유당공원 내 이근호 기념비에 단죄문을 설치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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