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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819
한자 尹弼五
영어공식명칭 Yoon Piro
이칭/별칭 매석(梅石)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0년 9월 12일연표보기 - 윤필오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95년 8월 - 윤필오 경상북도관찰부 주사 임명
활동 시기/일시 1899년 - 윤필오 달성학교 발기인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06년 - 윤필오 대구광학회 설립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윤필오 영양군수 부임 및 일진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12년 8월 - 윤필오 한국병합기념장 수훈
활동 시기/일시 1912년 9월 - 윤필오 예안군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월 - 윤필오 대구교풍회 회장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2월 - 윤필오 국민협회 대구지회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24년 3월 30일연표보기 - 윤필오 사망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경상북도 - 경상북도
성격 계몽운동가|친일 관료
성별 남성
대표 경력 대구교풍회 회장

[정의]

대구 출신의 계몽운동가이자 친일 관료.

[개설]

윤필오(尹弼五)[1860~1924]는 개항기 경상북도관찰부 주사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초반까지 영양군수·예안군수·비안군수를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제단 결성에 참여하고 대구교풍회(大邱矯風會) 회장을 지냈다. 그로 인해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7년에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95인 명단 중 정치·사회단체 부문에 포함하였다.

[가계]

윤필오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매석(梅石)이다. 아들은 독립운동가 윤우열(尹又烈)이다.

[활동 사항]

윤필오는 1895년 8월 경상북도관찰부 주사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비서과를 거쳐 세무과에서 근무하였다. 1899년 최극창(崔克昌)·장규원(張圭遠) 등과 함께 달성학교(達城學校) 설립 취지서를 작성하고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1900년 3월 29일 달성학교의 제2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06년에는 대중들의 근대 지식 개발과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기회 확대를 지향하는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의 설립에 참여하였고, 8월 28일 우현서루에서 열린 대구광학회 연설회에서는 임시회장을 맡았다. 1907년 6월 윤영섭(尹瑛燮)·양재기(梁在淇) 등과 함께 대구군 관할의 사령방(使令房)을 빌려 대구시의소와 별도로 시청(市廳)을 설립하였다. 1908년 7월 26일 달성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박중양(朴重陽)의 추천으로 영양군수에 임명되었다. 그 즈음 윤필오는 일진회(一進會)에 가입하였다. 1909년 윤필오는 영양군수로 재직하며 영양 교육회장 김도현(金道鉉)과 함께 영흥학교(英興學校)의 학교 기금을 적립하고 학생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1911년 6월 윤필오는 청송군 금융조합 설립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12년 9월에는 경상북도 예안군수로 부임하였으며, 10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대구지부 예안군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12년 10월에는 경상북도 비안군수로 부임하였d며, 1912년 8월 일본 정부로부터 일본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또한 1913년 6월에 경북 물산공진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윤필오는 1919년 1월 대구교풍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교풍회는 1917년 총독부가 민풍을 개량한다는 명목 아래 조직한 관변단체였다. 대구교풍회는 1917년 10월 대구경찰서의 주도로 결성되었다. 대구교풍회는 ‘미풍 양성, 악풍 교정’을 목적으로 하면서도 대구경찰서장의 지휘 감독을 받는다는 규정이 명시되어 있었다. 윤필오는 1919년 3월 8일 대구 자제단 발기인에 대구교풍회 회장 직함으로 참여하였다. 당시 자제단의 주요 목적은 독립만세운동 진압, 독립운동 참가자의 검거와 첩보 활동 등이었고, 단장은 박중양이었다.

윤필오는 1920년 2월 대구여자공립보통학교 학무위원으로 추천되었고, 3월 14일 대구향교에서 진행된 유도진흥회 경상북도지부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달성의 장의(掌議)에 선정되었다. 12월 무렵에는 ‘신일본주의’를 표방하며 일본의 중의원선거법을 식민지 조선에 시행할 것을 요구하는 등 참정권 청원을 주도한 국민협회의 대구지회장이 되었다. 1921년 경상북도지사가 정무총감에게 보낸 중추원 참의 추천 명단에 포함되었으나 중추원 의원으로는 임명되지 않았다. 윤필오는 1924년 3월 30일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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