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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726
한자 徐學伊
영어공식명칭 Seo Hagi
이칭/별칭 흑파(黑波)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0년 6월 15일연표보기 - 서학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서학이 용진단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5년 9월 29일 - 서학이 진우연맹 결성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6년 4월 - 서학이 파괴단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6년 6월 - 서학이 일제경찰에게 체포
활동 시기/일시 1927년 7월 5일 - 서학이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5녕형 언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5월 23일 - 서학이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 기각으로 1심형 확정
몰년 시기/일시 1955년 4월 13일연표보기 - 서학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서학이 건국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서학이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대황리 -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진우연맹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서학이(徐學伊)[1900~1955]는 1900년 6월 15일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무정부주의 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흑파(黑波)라는 별칭을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서학이는 1925년 무렵 대구의 북풍회 계열인 용진단(勇進團)에서 활동하였으며, 4월 20일 서울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전선민중운동자대회(全鮮民衆運動者大會)에 참가하기 위하여 용진단원들과 함께 상경하였다. 그러나 일제 관헌이 안녕질서를 해칠 우려가 있다며 「보안법」 제2조 위반을 들어 대회를 불허하자, 서학이를 비롯한 전선민중운동자대회 참석자들은 저녁에 우미관 앞에서 적기를 흔들고 무산자 만세를 외치면서 단성사까지 행진하였다. 이로 인하여 서학이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유치되었다.

1925년 9월 29일 서학이는 대구에서 방한상(方漢相)·서동성(徐東星)·김소성(金召成)·신재모(辛宰摸)·정명준(鄭命俊)·하종건(河鍾健)과 함께 진우연맹을 조직하였다. 이후 마명(馬鳴)·우해룡(禹海龍)[우해운(禹海雲)안달득(安達得)진우연맹에 가담하였다. 서학이는 무정부주의를 연구하던 중 무정부주의 잡지 『반역(反逆)』을 통하여 활동하던 구리하라 가즈오[栗原一雄]를 대구에서 만나게 되었다. 서학이를 비롯한 진우연맹 구성원들과 만난 구리하라 가즈오는 일본 무정부주의 조직 흑색청년연맹의 도쿄 긴자[銀座] 상점 파괴 등 여러 활동상을 설명하면서 흑색청년연맹 가입을 권유하였고, 서학이 등은 이를 받아들였다.

1926년 1월 12일 서학이를 비롯한 진우연맹 회원 10명은 대구부 신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일대]에 있던 신재모의 아내 이금이 집에 모여 파괴단을 결성하고 대구부 내 주요 기관 테러와 요인 암살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거사를 추진하던 중 5월에 안달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면서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서학이는 6월에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고 대구지방법원 검사국[현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었다. 1927년 7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고, 1928년 5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항소 기각으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서학이는 1955년 4월 13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서학이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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