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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615
한자 都性浩
영어공식명칭 Do Seongho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907년 1월 - 도성호 국채보상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07년 2월 17일 - 도성호 대구금연상채회 평의원 선임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민족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금연상채회 평의원

[정의]

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개설]

도성호(都性浩)[?~?]는 1902년부터 1906년 사이 경상북도관찰부 관할인 낙육재(樂育齋)에서 공부한 유생 출신이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활동 사항]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 문회(文會)는 특별총회를 열어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명칭을 변경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결의하였다. 1907년 2월 17일 광문사 사장이자 대동광문회 부회장이던 김광제(金光濟),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徐相敦), 대동광문회장 박해령(朴海齡)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위한 조직으로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와 대구민의소(大邱民議所)가 설립될 때 도성호금연상채회 평의원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대구 서문 밖 북후정(北堠亭)에서 대구민의소 주최로 대구군민대회를 개최하여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를 공표하고 국채 보상에 필요한 모금 활동을 결의할 때 도성호도 함께하였다. 또한 금연상채회의 제1회 의손 모금에 1원을 특별 의연하였다. 이후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가 『제국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 실리면서 국채보상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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