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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583
한자 金種耉
영어공식명칭 Kim Jonggu
이칭/별칭 한인유학생회,중일전쟁,한국독립당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세윤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7년 9월 22일연표보기 - 김종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31년 5월 - 김종구 한인유학생회 가입
활동 시기/일시 1931년 6월 - 김종구 한국독립당 가입
몰년 시기/일시 1964년 10월 20일연표보기 - 김종구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5년연표보기 - 김종구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거주|이주지 대구 - 대구광역시
활동지 상하이 - 중국 상하이시
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성
대표 경력 한국독립당 당원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종구(金種耉)[1907~1964]는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으며, 이후 대구에서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활동 사항]

김종구는 1907년 9월 22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중국 상하이[上海]에 유학 중이던 1931년 5월 김두봉(金枓奉)의 집에서 한인유학생회 회장 유진동(劉振東)의 권유로 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한인유학생회에 가입하였으며, 6월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였다. 1935년 7월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국내 청년들을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자 대구로 돌아온 김종구는 문상직(文相直)의 소개로 유봉견(兪鳳見) 등을 포섭하여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시키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상하이에서 상하이조선인민회 회장 이갑녕(李甲寧)과 함께 상하이 주둔 해군육전대는 약 3,000명, 의용대는 약 3,000명, 재향군인은 약 1,000명이고, 일본 육군은 아직 상하이에 도달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탐지하여,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중국군 상교(上校) 곽기원(郭琦元)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또한 곽기원이 조선으로 돌아가 일본의 대중국 작전계획 및 군대 수송 상황 등을 자세히 조사하여 줄 것을 부탁하자, 일본의 군사기밀을 탐지·수집할 목적으로 나가사키[長崎]·시모노세키[下關]를 거쳐 8월 25일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고향인 대구에서 일본군 정보 수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김종구는 1938년 6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외환(外患)에 관한 죄와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4년 10월 2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김종구의 공적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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