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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397
한자 崔致遠
영어공식명칭 Choi Chiwon
이칭/별칭 고운(孤雲),해운(海雲)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김충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857년연표보기 - 최치원 출생
활동 시기/일시 868년 - 최치원 당나라로 유학
활동 시기/일시 874년 - 최치원 당나라 빈공과 합격
활동 시기/일시 885년 - 최치원 신라로 귀국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5년 - 경운재 설립
출생지 금성 사량부 - 경상북도 경주시
거주|이주지 중국 - 중국
사당|배향지 고운 최선생 영당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766-4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경운재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791 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남성
본관 경주(慶州)
대표 관직 한림학사

[정의]

남북국시대 대구 지역에 은거한 학자.

[가계]

최치원(崔致遠)[857~?]의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다. 아버지는 최견일(崔肩逸)이다. 육두품(六頭品) 출신이라 사회적 진출에 많은 제약이 있었다.

[활동 사항]

최치원은 857년(문성왕 19) 금성(金城)[현 경상북도 경주시] 사량부(沙梁部)에서 태어났다. 868년(경문왕 8)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874년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885년(헌강왕 11) 귀국하여 한림학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최치원이 귀국하였을 무렵 신라는 사회가 혼란하고 국력이 약해져, 그 틈을 타서 후백제와 후고구려가 일어나는 혼란기였다. 최치원은 894년(진성여왕 8) 시무책 10조를 올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경주의 남산,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창원, 대구의 선사사(仙槎寺) 등 여러 곳을 떠돌다 합천의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사망하였다.

최치원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 있던 선사사에 머물렀다는 기록은 『속동문선(續東文選)』 제6권에 실려 있는 「선사사(仙槎寺)」라는 김종직(金宗直)의 시에서 확인된다. 그 시에는 “고운 최치원이 책을 묶던 풀들이, 물가에 가득이 바람에 나부끼네[孤雲書帶草, 獵獵滿池頭]”라는 구절이이 있다. 『대구읍지(大丘邑志)』의 고적(古蹟) 항목에도 “‘선사(仙槎)’는 하빈의 금호강 가에 있다. 문창후 최치원이 놀며 쉰 곳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최치원이 쓴 글 가운데 「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는 대구 관련 글이다.

[학문과 저술]

최치원의 저술로는 당나라에서 지은 시를 모은 『금체시(今體詩)』,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잡시부(雜詩賦)』 등이 있다. 문장은 형식미가 정제된 변려문체(騈儷文體)였는데, 『동문선(東文選)』과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상당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전한다. 최치원이 유교와 불교의 조화에 노력하였다는 사실이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 같은 글에서 확인된다. 『계원필경』,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사산비명(四山碑銘)』 등의 저술이 남아서 전한다.

[상훈과 추모]

1912년 경주최씨 후손들이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 766-4에 ‘문창후 고운 최선생 영당(文昌侯孤雲崔先生影堂)’을 세웠다. 영당 안에는 최치원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영당은 1990년 12월 15일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로 지정되었으나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영당 서쪽인 도동 791에는 1995년에 세운 최치원을 추모하는 재실인 경운재(景雲齋)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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