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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84
한자 裵廷芝
영어공식명칭 Bae Jungji
이칭/별칭 배공윤(裵公允),서한(瑞漢),금헌(琴軒)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도성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259년연표보기 - 배정지 출생
활동 시기/일시 1291년 - 배정지 중랑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318년 - 배정지 탐라존무사, 밀직부사 역임
몰년 시기/일시 1322년연표보기 - 배정지 사망
출생지 대구 - 대구광역시
거주|이주지 개경 - 북한 개성특별시
묘소|단소 배정지 묘소 - 북한 황해북도 금천군 우봉면
묘소|단소 배정지 묘지명 -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용산동6가 168-6] 국립중앙박물관
사당|배향지 초동사 -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석관로 362-15[문동리 803]
성격 무관
성별 남성
본관 대구(大邱)
대표 관직 호군|탐라존무사|밀직부사

[정의]

고려 후기 대구 출신의 무관.

[가계]

배정지(裵廷芝)[1259~1322]의 본관은 대구(大邱)이며, 자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이다. 어릴 적 이름은 배공윤(裵公允)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배손적(裵孫迪)이고, 할아버지는 배인검(裵仁儉)이다. 아버지는 민부전서(民部典書)를 지낸 배영(裵瑩)이고, 부인은 낭장 정승백(鄭承伯)의 딸이다. 아들은 배성경(裵成慶)·배천경(裵天慶)·배함경(裵咸慶)이다.

[활동 사항]

배정지는 1259년(고종 46) 대구에서 태어나 1268년(원종 9) 열 살 때 금위(禁衛)에 들어가 도지(都知)가 되었다. 1270년에 강화(江華)에서 개경(開京)으로 환도할 때 왕을 호위한 공으로 대정(隊正)이 되었다. 1291년(충렬왕 17) 몽고인으로 고려에 귀화한 만호(萬戶) 인후(印侯)의 별장으로 원나라 반란군인 합단적(哈丹賊)을 충청도 연기(燕岐)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때 화살이 턱뼈를 관통하는 중상에도 불구하고 분전하여 전과를 거둠으로써 중랑장으로 승진하였다. 그 뒤 인후를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 원 세조(世祖)로부터 용사 칭호와 함께 상으로 백금 50냥을 받았다.

배정지는 이후 충청도와 전라도의 찰방이 되어 간교한 자들을 억누르고 고아와 자식 없는 늙은이들을 보살펴서 그 일대가 평온해졌다. 충선왕(忠宣王) 때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곡식을 맡아보던 일과 구휼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 1318년(충숙왕 5)에 상호군(上護軍)으로서 탐라존무사(耽羅存撫使)가 되어 반란을 일으킨 제주민(濟州民) 김성(金成) 등을 토벌하고 돌아와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1321년에 옥사가 일어나 귀양을 갔다가 풀려난 뒤에는 거문고와 바둑으로 여생을 보내다가 1322년 사망하였다.

[묘소]

배정지의 묘소는 우봉현 도리촌[현 북한 황해북도 금천군 우봉면]에 있다.

[상훈과 추모]

배정지는 전라남도 나주시 다시면 석관로 362-15[문동리 803]의 초동사(草洞祠)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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