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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249
한자 金魯
영어공식명칭 Kim Ro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765년 - 김로 대구판관 부임
활동 시기/일시 1769년 - 김로 대구판관 이임
부임|활동지 대구 - 대구광역시
성격 문관
성별 남성
본관 연안(延安)
대표 관직 대구판관|삭녕군수

[정의]

조선 후기 대구판관을 역임한 문관.

[개설]

김로(金魯)[?~?]는 5년간 대구판관으로 재임하면서 대구 지역의 학문 진흥에 기여하였고, 다수의 수리 시설을 정비하거나 수축하였다.

[가계]

김로의 부인은 판서 박사익(朴師益)[1675~1736]의 딸 반남박씨(潘南朴氏)이며, 슬하에 1남 2녀를 둔 것으로 『만가보(萬家譜)』에 기록되어 있다.

[활동 사항]

김로대구판관으로 재임 중이던 1765년(영조 41) 대구부 관아 건물인 매죽헌(梅竹軒)을 완공하였고, 1766년 대구향교의 동신문(東新門) 밖에 양사재(養士齋)를 창건하고 상량문(上樑文)과 기문(記文)을 지었다. 1768년에는 동헌(東軒)인 팔달헌(八達軒)의 이름을 지었고, 척금루(滌襟樓)를 개수하고 기문을 썼다. 이 밖에도 대구광역시 수성구에 원정제(元亭堤), 달서구에 성당신제(聖堂新堤), 달성군 하빈면에 마천동신제(馬川洞新堤)[현재는 없어짐]와 화원면에 마비제(馬飛堤), 경상북도 청도군 각남면에 가양제(加陽堤)와 사외제(沙外堤)를 축성하였다.

[학문과 저술]

김로는 1678년 봄에 대구향교양사재 기문을 직접 써서 “내가 원하는 바는 제군들이 혈기대로 행하지 말고 오직 하나의 의리로써 판단한다면 덕업의 진전과 학업의 수양을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시험을 위한 글짓기의 작은 재주에 대하여서는 어찌 제군들을 위하여 말하겠는가. 내가 이곳의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간 뒤에 영남에 재덕(才德)과 문학이 빼어난 사람이 있다고 듣게 된다면 반드시 이 재실에 있었던 사람이리라”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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