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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2032
한자 全慶昌 遺蹟碑
영어공식명칭 Jeon Gyeongchang Yujeokbi[Gyedong Seonsang OksanJeongong Yujeokbi]
이칭/별칭 계동선생 옥산전공 유적비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비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로2안길 6-25[파동 425]
시대 조선/조선 전기,근대/개항기,현대/현대
집필자 구본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32년 1월 9일 - 전경창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85년 10월 9일 - 전경창 사망
건립 시기/일시 2003년 12월연표보기 - 전경창 유적비 건립
현 소재지 무동재 -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로2안길 6-25[파동 425]지도보기
성격 유적비
양식 귀부|비신|이수
관련 인물 전경창
재질 오석
크기(높이, 너비, 두께) 202.5㎝[높이]|76.5㎝[너비]|45.5㎝[두께]
소유자 옥산전씨 통례공문중
관리자 옥산전씨 통례공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 있는 조선 전기 성리학자 전경창의 유적비.

[개설]

전경창 유적비(全慶昌 遺蹟碑)[계동선생 옥산전공 유적비(溪東先生玉山全公遺蹟碑)]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1532~1585]을 기리고자 2003년 12월 21일에 건립한 유적비이다.

전경창은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서 태어났다.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였다. 1563년 계동정사(溪東精舍)에서 강학하였으며,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1519~1592]과 함께 1564년 대구 지역 최초의 서원인 연경서원(硏經書院)을 창건하였다. 대구 지역 성리학의 제1세대로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태암(苔巖) 이주(李輈),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괴헌(槐軒) 곽재겸(郭再謙),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연정(蓮亭) 류요신(柳堯臣) 등 제2세대 성리학자를 양성하였다. 대구 지역은 전경창이 교육을 애쓴 이후 학술과 교육, 문화의 도시가 되었다.

[건립 경위]

전경창의 제사를 연경서원에서 지냈으나 연경서원이 1871년 훼철되었고 1980년대에는 무동재(武洞齋)에서 석채례(釋菜禮)[간단하게 약식으로 지내는 제사 의식]를 드렸으나 이마저도 중단되었다. 그리하여 전경창을 기리는 뜻을 잇고자 2003년에 무동재에 유적비를 건립하였다. 무동재전경창이 학문을 닦던 계동정사의 옛터에 지은 재실인데, 1978년에 중건하였다. 2019년에 건립한 전계신 신도비[증자헌대부 병조판서 파수 옥산전공 신도비]가 유적비 옆에 서 있는데, 전경창의 육촌 아우인 전계신(全繼信)[1562~1614]은 조선 후기 무관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도 활약하였다.

[위치]

전경창 유적비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425 무동재 동편에 있다.

[형태]

전경창 유적비는 귀부(龜趺), 비신(碑身),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다. 오석 재질의 비신은 높이 202.5㎝㎝, 너비 76.5㎝, 두께 45.5㎝의 규모이다.

[금석문]

전경창 유적비에는 ‘계동선생 옥산전공 유적비(溪東先生玉山全公遺蹟碑銘)’라는 비제가 적혀 있고, 전경창에 대한 소개와 추모의 뜻 등을 한문으로 기록하고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조선 명종 선조의 즈음에 사람과 문학이 크게 성하여 충성하고 정직하여 과감하게 말하는 선비가 많이 나서 착한 일을 베풀고 사특함을 없애고 임금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도우며 염치를 숭상하고 탐관을 내쳐서 백성을 구원하고 세상을 건지는 자는 예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계동선생(溪東先生) 옥산전공(玉山全公)이 즉 그 가운데 한 분이시다. 별세 후 400여 년에 오히려 유적비가 없었더니 계미년(癸未年) 겨울에 가까이 있는 후손들이 비로소 공의(公議)를 발하여 이에 한 돌을 다듬어서 장차 무동재 곁에 세우고자 광섭, 영수, 병걸, 봉진, 현수가 그 문중의 의논으로 손모당(孫慕堂)이 지은 행장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명문(銘文)을 구함에 재주 없는 사람이 글이 부족하여 사양하였는데 그 청이 더욱 간절하여 가히 끝내 침묵할 수 없어 드디어 행장을 고찰하여 뽑아서 글을 지어 말하니 선생의 휘(諱)는 경창이요 자는 계하(季賀)계동(溪東)은 그 호이다……[國朝明宣之際 人文大盛 忠直敢言之士 多出而陳善閉邪 匡君補國 崇廉黜贓 救民濟世者 故司諫院正言 溪東先生玉山全公 卽其一也 沒後四百餘禩 尚闕遺蹟之刻 癸未冬 傍後孫 始發公議 爰治一石 將立于武洞齋之側 光燮永洙柄傑鳳瑨炫洙 以其門議 奉孫慕堂所撰行狀 而來請銘于不佞 不佞辭以不文 其請益固 不可終默故 遂按狀 撮而書之曰 先生 諱 慶昌 字 季賀 溪東 其號也……].”

[현황]

전경창 유적비옥산전씨 통례공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전경창 유적비는 조선시대 대구 지역의 성리학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전경창의 생애와 교육 정신, 그리고 대구 성리학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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