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40002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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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義城 觀德洞 石獅子 |
영어공식명칭 | Uiseong Gwandeok-dong Seoksaja|Stone Lions from Gwandeok-dong, Uiseo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황금동 70]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 |
집필자 | 박병선 |
문화재 지정 일시 | 1963년 1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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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994년 - 의성 관덕동 석사자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이관 |
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6월 29일 - 의성 관덕동 석사자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황금동 70]![]() |
원소재지 | 의성 관덕동 석사자 -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관덕동 |
성격 | 석상 |
크기(높이,길이,둘레) | 52㎝[암사자 높이]|35㎝[수사자 높이]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국립대구박물관 |
문화재 지정 번호 | 보물 |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된 남북국시대 석상.
의성 관덕동 석사자(義城觀德洞石獅子)는 원래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에 있는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義城觀德里三層石塔)[국가지정문화재 보물] 모서리에 각각 배치되었던 네 개의 사자상 중 한 쌍이다. 나머지 한 쌍은 1940년에 분실되었다. 조성 시기는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과 같은 시기인 9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원래 의성 관덕동 석사자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여 오다가 1994년 국립대구박물관으로 이관되었다. 두 사자 모두 마멸이 심하여 각 부분의 세밀한 조각 수법은 분명하지 않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02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의성 관덕동 석사자의 정확한 건립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의성 관덕리 삼층석탑의 기단부에 비천상과 보살상·사천왕상, 탑신부에 보살상을 조각한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인 9세기 후반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의성 관덕동 석사자는 국립대구박물관 중세문화실에 상설 전시 중이다.
의성 관덕동 석사자 중 암사자의 높이는 52㎝, 수사자의 높이는 35㎝이다. 암사자는 앞발을 곧게 세우고 뒷발은 구부린 앉은 자세를 취하였다. 눈·코·입 등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마멸된 면상(面相)은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굵은 목에는 아직도 영락(瓔珞)[구슬을 꿰어 만든 장신구]이 남아 있어서 불국사 다보탑 돌사자의 장식을 연상하게 한다. 곧게 뻗은 두 다리에는 힘찬 약동감을 나타내는 근육이 뚜렷이 있다. 그리고 오른발에는 아직도 예리한 발톱이 남아 있어서 맹수의 위용을 잃지 않고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양발 사이와 배 밑에 세 마리의 새끼 사자가 있고 그중 한 마리가 어미의 젖을 빨고 있는 희귀한 모습이다. 수사자는 두 조각의 파편만 전해질 뿐이어서 각 세부의 수법은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암사자와 같이 앉은 자세이며 고개를 약간 좌측으로 틀고 있어서 암수가 서로 마주 보는 배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마멸이 심한 탓에 맹수의 기상이 감소되긴 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혀 있고, 형태가 우아하고 양쪽 발과 앞가슴의 근육 등에서 힘찬 조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팽창감 있는 균형 잡힌 자세는 사실성이 역력하다.
의성 관덕동 석사자는 비사실적이며 도식성이 가해진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의 괘릉(掛陵) 돌사자와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서 옮겨와 함께 보관되어 있는 돌사자 등과는 조형 기법이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의성 관덕동 석사자는 이상적인 조각 수법에서 탈피한 불국사 다보탑 돌사자 양식을 거친 조형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의성 관덕동 석사자 가운데 암사자가 새끼 사자에게 젖을 주고 있는 모습은 아주 드문 경우로 조각사적 의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