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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69
한자 城山齋
영어공식명칭 Seongsanjae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로33길 6-27[성동 20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전일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8년연표보기 - 성산재 건립
현 소재지 성산재 -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로33길 6-27[성동 203]지도보기
성격 재실
양식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 와가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인천채씨 문중
관리자 인천채씨 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성동에 있는 채선수를 추모하는 재실.

[개설]

성산재(城山齋)는 조선 후기 학자이자 의병장 채선수(蔡先修)[1568~1633]를 기리기 위하여 인천채씨(利川蔡氏) 문중에서 건립한 묘소 재실이다. ‘성산재’란 고산토성 아래에 지은 집이란 의미로 붙인 당호이다.

채선수의 자는 경중(敬仲), 호는 달서재(達西齋)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과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1529~1584]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열아홉 살 때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문하에 들어가 문장이 대성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최동보(崔東輔)·곽재겸(郭再謙) 등과 팔공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경산좌도방어사 곽재우(郭再祐)가 지키고 있는 창녕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성을 지켰다. 전란이 끝난 후에 향리의 달서재(達西齋)에서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등과 경서와 역사서 연구에 힘을 쏟았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에도 의병을 일으켰다. 서서로는 『달서재문집(達西齋文集)』 3권이 전한다.

[위치]

성산재수성구 성동 203에 있다.

[변천]

성산재는 1938년 건립되어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형태]

성산재는 정면 4칸[방 2칸, 대청 2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을 얹은 목조 기와집이다.

[현황]

성산재에 관리인이 거주하지는 않으나 인천채씨 문중에서 잘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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