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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이씨 창렬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04
한자 德山 李氏 彰烈閣
영어공식명칭 Deoksan Yissi Changnyeolgak
분야 종교/유교
유형 유적/건물
지역 대구광역시 북구 도남동 산117-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전일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31년연표보기 - 덕산 이씨 창렬각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984년 - 덕산 이씨 창렬각 보수
이전 시기/일시 2009년 9월 - 덕산 이씨 창렬각 대구광역시 북구 도남동 623-3에서 도남동 산117-3으로 이전
현 소재지 덕산 이씨 창렬각 - 대구광역시 북구 도남동 산117-3 지도보기
원소재지 덕산 이씨 창렬각 - 대구광역시 북구 도남길 92-58[도남동 623-3]
성격 창렬각
양식 목조 기와집|기와집 형식 석물
소유자 인천이씨 문중
관리자 인천이씨 문중

[정의]

대구광역시 북구 도남동에 있는 일제강점기 창렬각.

[개설]

덕산 이씨 창렬각(德山李氏彰烈閣)은 일제강점기 열녀였던 덕산 이씨의 효행과 정절을 후손들이 잊지 않고자 건립된 창렬각이다. 이씨는 인천이씨(仁川李氏) 이재엽(李載燁)의 아내로서, 시집을 가기 전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가 있는 등 모든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으며, 시집을 가서 남편에게 도리를 다하였다. 1921년 11월에 남편이 병이 들어 위독한 지경이 되자 밤낮으로 약을 달여 지극정성으로 간병하였으나 남편은 운명을 달리하였다. 그 당시 겨우 열일곱의 나이였던 이씨는 정절을 지킨다는 마음으로 남편을 따라 죽기를 맹세하였지만, 시아버지가 간곡히 달래었다. 부인은 남편의 장례를 법도에 따라 치르고 시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위로하고자 정성으로 봉양하다가, 두어 달이 지날 무렵 홀연히 조용히 운명하였다.

이씨의 정절을 인정하여 1923년 9월 칠곡군수 심완진(沈浣鎭)이 표창을 하였고, 충효의 덕목을 교육하고 장려하는 기관이었던 유림향약본소(儒林鄕約本所)에서 1931년 9월에 ‘포창완의문(褒彰完議文)’을 내렸다.

[위치]

덕산 이씨 창렬각대구광역시 북구 도남동 산117-3에 있다. 산 중턱에 문중 묘소와 함께 있다.

[변천]

1923년에 칠곡군수 심완진의 표창으로 1931년에 포창완의문이 내려왔고, 문중에서 이를 기리고자, 현재의 대구광역시 북구 도남동 623-3에 약 33㎡[10평]의 대지 위에 약 6.6㎡[2평] 규모로 덕산 이씨 창렬각을 건립하였다. 그후 1984년 보수를 하였으나 지속적인 유지관리가 어려워, 논의를 거쳐 2009년 6월 현재의 도남동 산117-3으로 이전하였다.

[형태]

덕산 이씨 창렬각은 예전에는 목조 기와집의 형식을 취하였는데, 이전하면서 기와집 형식의 석물로 새롭게 건립하여 그 뜻을 보전하고 있다.

[현황]

덕산 이씨 창렬각인천이씨 문중에서 문중의 묘소와 같이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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