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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713
한자 龜尾 善山邑 金銅如來立像
영어공식명칭 Gumi Seonsan-eup Geumdongyeoraeipsang
분야 종교/불교
유형 유물/불상
지역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황금동 70]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박병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7세기 후반~8세기 초반 -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제작 추정
출토|발굴 시기/일시 1976년 -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출토
문화재 지정 일시 1976년 4월 23일연표보기 -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국보 제182호로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21년 6월 29일 -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장처 국립대구박물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321[황금동 70]지도보기
출토|발견지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 출토지 -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봉한2리
성격 불상
재질 금동
크기(높이) 40.3㎝
소유자 국유
관리자 국립대구박물관
문화재 지정 번호 국보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국립대구박물관에 있는 남북국시대 불상.

[개설]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龜尾善山邑金銅如來立像)[국보 제182호]은 1976년,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고아읍 봉한2리에 해당하는 경상북도 선산군 고아면 봉한2리 뒷산에서 사태막이 공사를 하던 중,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3호],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4호]와 함께 출토되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의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들이 많이 출토되어서 원래 절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만든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왼손과 왼발 일부가 없어지고 얼굴과 가슴에 약간의 녹이 있으나 도금 상태는 좋은 편이다. 1976년 4월 23일에 국보 제182호로 지정되었다. 그 후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현재 대구광역시 수성구 황금동 70에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형태]

높이 40.3㎝의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나발]이 표현되어 있고, 그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다. 양감 있는 얼굴은 원만하며, 예리한 선으로 눈·코·입을 표현하였다. 법의(法衣)는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는데, 몸에 달라붙어서 신체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법의의 자락은 배부분에서 평행한 유(U) 자형의 주름을 이루고, 다리 부분에서 좌우로 갈라져 대칭을 이루면서 발목까지 드리워졌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이 앞을 향하도록 하고 있으며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여 역시 손바닥을 보이고 있어, 여래의 전형적인 손동작인 시무외인(施無畏印)과 여원인(與願印)을 보인다.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은 몸의 형태나 세부 표현이 부드럽고 단순하며 법의의 주름이 정리되어 단정한 인상을 줌으로써, 남북국시대 때 만들어진 불상들에서 나타나는 생동하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소 경직된 자세와 기교 없이 소박한 미소가 남아 있는 얼굴, 우전왕(優塡王)식의 착의법, 뒷면에 작은 틀잡이 구멍이 있는 중공식 주조법 등을 고려하면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에 조성된 작품으로 추정된다.

[특징]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의 양식적 요소들은 중국 당나라 초기의 조각 양식과 관계가 있다.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의 형식과 비슷한 신라 불상으로는 719년의 명(銘)이 있는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慶州甘山寺石造阿彌陀如來立像)[국보]을 들 수 있는데, 경주 감산사 석조아미타여래입상은 남북국시대 때 유행하던 불입상(佛立像) 형식을 대표하고 있다.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제183호]은 법의 형식의 금동불입상 중에서는 비교적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8세기 중엽에 이르면 법의와 불신이 조형적으로 통일감을 이루어 전형적인 남북국시대의 전성기 양식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은 아직 형태가 단순하고 자세가 굳었으며 표현 수법에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점으로 보아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된다.

[의의와 평가]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과 함께 발견된 두 구의 불상은 모두 약간씩 다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함께 출토된 세 구의 불상 중에서 구미 선산읍 금동여래입상이 가장 늦은 시기에 속하며, 남북국시대 여래상의 대표적인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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