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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치반대대구시민대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623
한자 託治反對 大邱市民大會
영어공식명칭 Takchibandae-Daegusimindaeho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6년 1월 2일연표보기 - 탁치반대대구시민대회 개최
성격 사회운동

[정의]

1946년 1월 2일 대구 지역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집회.

[역사적 배경]

1945년 12월 열린 모스크바삼상회에서는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 등을 포함한 모스크바협정이 체결되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 신탁통치안 결정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면서 1945년 12월 31일 서울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고 이후로 전국 곳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대구광역시에 해당하는 경상북도 대구부에서도 1946년 1월 2일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대중 정치 집회로서 탁치반대대구시민대회가 열렸다. 탁치반대대구시민대회조선신탁반대공동투쟁위원회가 개최한 시민 집회였는데, 조선신탁반대공동투쟁위원회경북도 인민위원회조선독립경북촉진회 등 대구 좌우익 정치단체 및 사회단체가 연합하여 결성하였다.

[경과]

탁치반대대구시민대회는 1946년 1월 2일 대구역광장에서 조선신탁반대공동투쟁위원회의 주최로 열렸다. 조선신탁반대공동투쟁위원회는 좌우익 연합으로 구성되어, 우익의 최성환과 좌익의 배승환이 공동 대표위원을 맡았다. 오후 한 시에 열린 탁치반대대구시민대회에는 대구 지역의 100여 개 정치단체·사회단체와 시민, 학생이 많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탁치반대대구시민대회는 최성환의 개회사로 시작되어 치안대장 신철수, 조선독립경북촉진회 대표위원 김하정, 경북도 대리지사 김의균의 순서로 신탁 관리 반대 연설이 있었다. 또한, 신탁통치에 반대한 격문과 선언문이 낭독되고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격문은 “절대 자주독립”, “신탁통치 절대 배격” 등이 핵심 내용이었고 선언문도 비슷한 내용이었다. 결의문에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후 질서를 논의한 카이로회담, 포츠담회담 등에서 우리나라와 관련하여 ‘독립’을 결정하였음을 되새기며, 신탁통치는 미국, 영국, 소련, 중국 등 4개국의 공동 식민지 신세가 될 것이라고 규정하며, 자주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우리나라를 공동 신탁통치에 두는 것은 자주독립 국가 건설을 침해하고 민주주의적 세계 평화 건설에 심각하게 어긋난 결정이므로 온 힘을 기울여 신탁통치 반대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결과]

탁치반대대구시민대회를 마친 후 참가자들은 시가행진을 벌였다. 탁치반대대구시민대회가 개최된 날, 대구사범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개최한 신탁통치 반대 대회와 경북교육협회가 개최한 신탁통치반대경북교육자대회가 열렸다.

[의의와 평가]

탁치반대대구시민대회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안이 신탁통치안으로 알려지면서 대구의 좌우익 정치단체·사회단체가 개최한 첫 신탁통치 반대 시민대회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후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합의안이 다시 전하여지면서 탁치반대대구시위원회는 신탁통치 지지의 좌익과 신탁통치 반대의 우익으로 분화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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