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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99
한자 朝鮮殖産銀行 大邱支店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67[포정동 33]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최초 설립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67[포정동 33]
현 소재지 대구근대역사관 - 대구광역시 중구 경상감영길 67[포정동 33]지도보기
성격 금융기관|식민지금융기관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 설치된 조선식산은행 소속 지점.

[개설]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은 일제강점기인 1918년 10월 조선총독부의 금융정책에 따라 대구 지역에 설립된 금융기관이다.

[설립 목적]

조선총독부의 ‘제반 신시설 보급’과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호황으로 인하여 조선의 경제계가 융성해지고 산업자금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조선의 경제 구조가 유통 부문에서 생산부문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특히 1910년대 교통·통신 등 기간 설비가 구축되었고,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었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전후로 동양척식주식회사조선은행은 만주로 진출하여 엔블록 확장에 주력하였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의 산업금융기관을 강화해야 했다. 특히 각 지역에 설치된 농공은행은 자금 조달의 취약성, 상업 부분에 대한 과다 대출, 경기 침체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심각한 부실화가 진행되었다. 따라서 일제는 농공은행을 대신할 새로운 금융기관이 필요해졌다.

[변천]

1906년 대구농공은행이 자본금 14만 원으로 설립되었다. 1908년 대구농공은행이 진주농공은행과 합병되면서 경상농공은행으로 명칭을 바꾸었고, 자본금도 20만 원으로 늘렸다. 1909년 경상농공은행 김천지점 설치를 시작으로 부산, 마산, 통영, 상주, 포항 등 7개 지점을 경상도에 설치하면서 은행 규모를 확장하였다.

일제는 1918년 10월 「조선식산은행령」[제령 제7호, 1918년 6월 공포]을 근거로 경상농공은행을 없애고 자본금 1,000만 원을 기반으로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을 설립하였다.

경상농공은행의 은행장 이병학, 이사 역의 이종면, 김이욱, 서병조, 윤상태, 감사 역의 정재학, 강위수 등이 모두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의 상담역[자문기관]으로 편입되었다. 이것은 경상농공은행의 주주나 중역이었던 조선인 상층부의 상인, 지주, 관료 출신 자본가가 가진 권리를 박탈하고 일본이 조선의 금융권을 독점하겠다는 의도였다.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은 1950년 2월 한국식산은행 대구지점으로 명칭이 바뀌었고, 1954년에는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으로 변경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은 주로 수리 사업, 농업, 토지개량 등 산미증식계획과 관련된 곳과 경상북도 지역의 금융조합에 자금 조절을 담당하는 금융조합연합회 등에 중점적으로 대출을 하였다.

[현황]

한국산업은행 대구지점 건물은 2003년 4월 30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9호로 지정되었다. 대구광역시가 2008년 대구도시공사에서 기증받아 2011년부터 대구근대역사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일제시대 식민지 경제를 지배하고 수탈한 대표적인 기관이다. 따라서 독립운동가 장진홍은 1927년 대구 지역에서 식민지 통치 기구인 경북도청과 경북경찰부, 그리고 조선 민중을 수탈하는 대표적 금융기관인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파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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