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제3대 정부통령선거와개표중단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86
한자 第三代 正副統領選擧- 改票中斷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6년 5월 15일연표보기 - 제3대 정부통령선거와 개표중단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56년 5월 20일연표보기 - 제3대 정부통령선거와 개표중단사건 종결
발생|시작 장소 제3대 정부통령 선거의 개표 중단 사건 발생 장소 -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로 88[동인동1가 2-1]지도보기
종결 장소 제3대 정부통령 선거의 개표 중단 사건 종결 장소 - 대구광역시 중구 공평로 88[동인동1가 2-1]지도보기
성격 정치 사건

[정의]

1956년 5월 15일에 대구 지역에서 제3대 정부통령 선거의 개표가 중단된 사건.

[역사적 배경]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 장면에게 득표수가 밀렸던 자유당과 이기붕 후보가 선거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하여 개표를 중단시켰다.

[경과]

집권 여당인 자유당은 1954년 국회에서 사사오입(四捨五入)의 논리로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켜, 이승만 대통령이 세 번째 대통령 후보로 등록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결국, 자유당은 1956년 3월 제7차 임시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이승만을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 이기붕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한편, 민주당에서는 신익희를 대통령 후보로, 장면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진보당에서는 조봉암을 대통령 후보로, 서상일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지만, 서상일이 사퇴하여 박기출이 부통령 후보가 되었다. 1956년 4월 7일에 입후보자 등록을 마치면서 선거운동이 본격화하였다.

민주당이 대구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선거유세를 시작하였다. 민주당은 1956년 4월 15일에 대구 수성천 변에서 선거유세를 시작하였다. 신익희·장면 후보가 연설할 당시 약 10만 명의 청중이 참여하였다. 4월 29일 수성천 변에서 진보당 조봉암이 연설할 당시에는 약 2만 명이 모였다. 4월 30일 대구역 광장에서 이범석 후보가, 만경관 옆 소개지에서는 자유당 이기붕 후보가 선거유세를 하였다. 한편, 1956년 5월 5일에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급서하면서 선거 양상이 급변하였다.

1956년 5월 15일에 대구 시내 141개 투표소에서 대구시 유권자 21만 3175명 가운데 18만 966명[84%]이 투표에 참여하였다. 대통령 선거의 득표수에서는 조봉암 10만 1120명, 이승만 3만 8813로 득표율이 2.6배나 차이가 났다. 부통령 선거의 득표수는 장면 14만 1560명, 이기붕 2만 2394명, 이범식 3,926명, 윤치영 2,399명, 백성욱 1,897명, 이윤영 473명이었다. 장면을 제외한 모든 후보자의 득표수는 3만 1089명이며, 장면의 득표수는 다른 후보와 비교하여 6.3배나 높았다. 이처럼, 대구의 정·부대통령의 선거에서 야당의 득표수가 여당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편, 부통령 선거 개표 과정에서 우리나라 선거 역사에서 초유의 개표 중단 사건이 발생하였다. 대구시청에 대구시의 개표소가 설치되었으며, 개표소는 3곳이었다. 1956년 5월 15일부터 개표가 시작되었다. 5월 16일 오후에 대구시 제3개표소에서 당시 대구시장 허흡(許洽)이 장면 후보의 유효 표 100매철 속에서 이기붕 후보의 유효 표 94매가 포함된 사실을 지적하였다. 대구시장 허흡이 문제 제기를 한 이후 정체불명의 괴한 약 20명이 제1개표소와 제2개표소에 난입하여 선거위원·개표 종사원·야당 참관인 등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장내 시설을 파괴하였다. 결국, 대구의 제2개표소와 제3개표소뿐 아니라 제1개표소까지 개표 업무가 중단되어 버렸다. 이때 대구 시민들은 투표함을 지키면서, 개표소에서 부정선거에 반대하는 농성을 하였다.

대구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개표가 완료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이 당선하였지만, 부통령 선거에서는 장면이 이기붕을 8만 7,000여 표 앞질렀다. 대구의 개표 결과에 따라 제4대 부통령의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정부에서는 5월 17. 18일 이틀에 걸쳐 긴급국무위원 간담회를 개최하여 개표 중단 사태를 논의하였다. 또 5월 17일 오후 5시에 대구시 3개 개표위원회는 개표장을 현 상태로 대구시장에게 보관을 위임하고, 남대구경찰서장에게 치안을 의뢰하였다. 또 대구 제1선거구 개표위원장 김동진 외 20명이 공동 사퇴하였다. 결국 개표위원회 개편을 둘러싸고 여야의 의견이 대립되었고, 개표 중단은 계속되었다.

[결과]

1956년 5월 19일에 이승만 대통령이 장면의 부통령 당선을 발표하면서, 대구시의 개표 중단 사건의 상황이 달라졌다. 경북도청 회의실에서 자유당·민주당 양당 대표가 연석회의를 가져 민주당이 제의하였던 5개 항의 요구 조건을 자유당이 수용하면서 사태가 호전되었다. 1956년 5월 20일 오전 11부터 개표가 재개되었다.

[의의와 평가]

제3대 정부통령선거와개표중단사건은 1950년대에 이승만 정부와 집권 여당인 자유당이 선거 승리를 위하여 일으킨 대표적 부정선거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대구 시민들은 부정선거에 대하여 저항하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