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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유림단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82
한자 第二次 儒林團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창숙|송영호|김화식|이봉로|손후익|이종흠|이재락|김창탁|이원태|이우락|이영로|홍순철|김동식

[정의]

1925년부터 1926년까지 대구를 비롯한 영남 일대에서 유림 대표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일으킨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김창숙(金昌淑)은 1925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이회영(李會榮)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김창숙과 이회영은 즉각적인 독립전쟁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장기적인 독립전쟁 전략을 구상하기로 하였다. 김창숙은 새로운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여 무장투쟁을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할 계획을 세웠다. 김창숙은 일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만주와 몽골 사이 국경지대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당시 베이징에 있던 김창숙은 만주 군벌 펑위샹[馮玉祥]을 만나 현재 내몽골자치구에 있는 쑤이위안[綏遠][현 오르도스]와 바오터우[包頭]의 땅 약 3만 정보[297.520661㎢]를 구입하여 독립운동 기지로 개간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경과]

1925년 4월부터 김창숙은 당시 베이징에 거주하던 송영호(宋永祜)[경북 영주 출신]·김화식(金華植)[경북 봉화 출신]·이봉로(李鳳魯)[대구 달성군 출신] 등과 함께 독립운동 기지, 무관학교 설립, 국내 진공 계획, 독립 자금 마련 방법 등을 논의하면서, 계획을 구체화하였다. 우선, 베이징 근처 스징산[石景山] 주변의 미간지를 독립운동 기지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스징산은 베이징과 가까워 교통이 편리하고 독립운동에 유리하고, 토지 매입 가격이 20만 원으로 비교적 저렴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한 세부적인 안도 마련하였다. 3남 지방[경상도·충청도·전라도] 일대에서 20만 원을 모집하고, 권총을 구입하여 원활하게 독립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김창숙·김화식·송영호는 국내에서 독립 자금을 마련하고, 이봉로베이징에 잔류하면서 국내외 연락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김창숙은 자금 모집을 총지휘하고, 김화식·송영호는 각 지역을 돌면서 자금 모집 활동과 제반 실무를 맡았다.

1925년 6월 말 송영호가 먼저 국내로 들어와 김화식과 김창숙이 국내로 진입하는 데 필요한 600원의 경비를 마련하였다. 김화식은 7월, 김창숙은 8월에 국내에 들어와 서울을 기점으로 독립 자금을 모집하였으나 성과가 부진하였다. 자금 모집이 어려워지자 무장을 갖추어 지역에 모금 단원을 파견하고, 모금을 활성화하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따라서 1925년 10월 하순 김창숙·김화식·송영호·곽윤·김황·손후익·하장환·이우근 등이 서울 김창숙 숙소에서 신건동맹단을 결성하고, 단원의 역할과 독립 자금 모금의 담당 구역을 정하였다. 김창숙은 총지휘, 김화식은 실무 책임과 울산·밀양·진주·산청·성주를, 송영호는 실무 책임과 봉화·영주·대구를, 정수기는 안동·봉화·성주·대구를, 손후익은 경주·울산을, 곽윤은 진주·거창을, 김황은 산청·거창을 담당하였다. 주로 경상도 지역을 모금 범위로 정하고 활동하였으나, 모금액이 기대에 훨씬 못 미치고 모집 활동도 벽에 부딪혔다.

1925년 12월 말 김창숙은 대구로 내려와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하였다. 김창숙은 김화식·송영우·김헌식[김창숙의 족속]·박영로[김창숙의 매부]·김창백[김창숙의 종제]·이수기·홍묵·이동흠·이종흠 등과 함께 대구에 집결하여 독립 자금 마련을 위한 대책을 구성하였다. 이들은 대구를 기점으로 안동·예안·봉화·상주·영양·선산·영주·경주·양산·울산·청도·밀양·성주·고령·합천·단성·진주·의령·함안·마산·부산 등 경상도 전역으로 활동 무대를 넓혀 독립 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다. 청도군의 윤모, 주소 불명의 홍모를 불러 모집원으로 가입시키고, 예상 독립 자금 20만 원 가운데 4,000~5,000원을 먼저 모금하고, 김창숙이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또한 의열단과 연락을 취하여 폭탄과 권총 다수를 매입하여 무장투쟁을 펼치고, 신건동맹단원을 이용하여 대규모 모집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경남 일대에서는 김화식을 중심으로 독립 자금을 모금하기로 하였다. 김화식은 김황[경남 산청군], 하장환 등과 함께 진주 부호 이길호, 하재화, 울산 이재락에게 독립 자금을 확보하는 일을 맡았다. 김화수 일행이 15일 동안 경남 일대를 돌면서 독립 자금 모집을 하였으나 실적이 미비하였다.

김창숙은 1926년 1월 직접 울산으로 모금 활동을 하고자 울산으로 가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경찰이 김창숙 일행을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김창숙은 국내에서 독립 자금 모집 활동을 정리하기로 하고, 1926년 3월 3일 몸조리를 하던 부산 범어사에서 손후익·정수기·이재락 등과 마지막 회의를 하였다. 이때 의열단원을 국내로 파견하여 식민 통치 기구를 파괴하고, 진주의 하재화·하영진, 대구의 장길상, 춘양의 권상경처럼 비협조적인 친일 부호를 응징하기로 하였다. 김창숙은 1926년 3월 26일 봉천(奉天)에 도착하였고, 모집한 독립 자금 3,350원을 김창탁에게 인계받았다.

[결과]

1926년 4월 2일 김화식의 체포를 시작으로 5월 중순까지 약 61명이 체포되었다. 1927년 3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는 송영호·김화식 3년, 이봉로 2년, 손후익 1년 6월, 이종흠·이재락 1년, 김창탁·이원태 10월, 이우락·이영로 8월, 홍순철 벌금 70원, 김동식 벌금 30원을 선고하였다.

한편, 김창숙은 1926년 5월 상하이에서 이동녕·김구·김두봉·유자명[유우근]·정원 등을 만나 국내 인심이 죽어 있음을 설명하고 청년 결사를 국내로 파견하여 총독부 산하 기관을 파괴하여 의기를 고취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김구는 나석주와 이승훈을, 유자명은 한봉근을 추천하였다. 김구와 유자명은 1926년 7월 21일 톈진에서 한봉근·나석주·이승훈과 회합하여 유자명·한봉근·나석주·이승훈 등 4명이 국내에 들어가 의열 투쟁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의의와 평가]

제2유림단 사건은 1920년대 국내에서 의열 투쟁이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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