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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계의 독립청원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544
한자 儒林- 獨立請願運動
이칭/별칭 파리장서사건,제1차 유림단 사건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19년 3월 5일 - 유림계의 독립청원운동 3·1운동 유림 참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19년 3월 5일연표보기 - 유림계의 독립청원운동 시작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이종기|서건수|우하교|조석하|권상문|우성동|우찬기|우경동|우승기|서건수|김용호|박순호

[정의]

1919년 대구 지역 출신 유림 13명이 참여한 유림단의 독립청원운동.

[역사적 배경]

일제는 1919년 2월 이완용을 정당 대표로, 김윤식과 이용직을 유림 대표로 하여 일왕에게 한국 유림은 독립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을 담은 ‘합방 절대 지지 한일 불리 청원서(合邦絶對支持韓日不離請願書)’[일명 ‘독립불원서’] 를 보냈다. 독립불원서는 일제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며, 김윤식과 이용직은 일본이 자진 철수하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승인하라는 내용의 ‘대일본장서’를 일본 측에 제출하였다. 김윤식·이용직 명의의 ‘독립불원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유림 측은 ‘파리장서’를 서두르게 되었다.

한편, 종교계 인사들과 학생 조직에 의하여 3·1운동이 계획되고 추진되었다. 유림 측의 성태영은 김창숙을 유림 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게 하려고 주선하였으나, 김창숙의 상경이 늦어지면서 계획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3·1운동의 독립선언서에 참여하지 못하였던 유림계는 3·1운동이 일어나자 각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국제적인 독립운동에는 유림이 참여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하였다. 특히 1919년 5월 프랑스에서 개최되는 파리강화회의에 유림이 대표를 파견하여 조선의 독립에 관한 국제 여론을 조성하고 독립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영남 유림 계열과 호서의 기호 유림 계열은 독자적으로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영남 지역에서는 영남 유림의 대표 곽종석을 중심으로 독립청원운동을 펼쳤다. 김창숙은 1919년 3월 5일 서울에서 김황·곽윤 일행과 만나 독립청원서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다. 기암 이중업은 강원·충북을, 해사 김정호는 충남·충북을, 벽서 성태영은 경기·황해를, 우록 류준근은 전남·전북을, 만송 윤중수는 함남·함북을, 백은 유진태는 평남·평북을, 심산 김창숙은 경북·경남을 담당하여 전국적으로 유림의 독립 청원 동참을 호소하였다. 파리장서 서명자 137명 가운데 영남 지역의 유림은 62명이 참여하였다. 대구의 유림은 이종기(李鍾蘷)·서건수(徐健洙)·우하교(禹夏敎)·조석하(曺錫河)·권상문(權相文)·우성동(禹成東)·우찬기(禹瓚基)·우경동(禹經東)·우승기(禹升基)·서건수(徐健洙)·김용호(金容鎬)·박순호(朴純鎬) 등 13명이었다.

[결과]

곽종석은 김창숙에게 파리장서 전문을 암송하게 하고, 원문은 놋줄로 꼬아 짚신 총으로 만들어 전달하였다. 김창숙은 여비와 외교문서를 중국 무역회사 동순태(同順泰)를 통하여 펑톈[봉천] 분점으로 보냈다. 1919년 3월 22일 김창숙은 파리장서를 들고 출국하여, 펑톈 분점에서 여비와 외교문서를 찾아 3월 27일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김창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차원에서 민족 대표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김규식을 프랑스 파리에 파견한 것을 알고, 문서를 김규식과 국내 각 향교에 발송하였다. 당시 파리장서의 인쇄 부수는 한문본 3,000부, 영문본 2,000부였다고 한다. 1919년 4월 12일 파리장서 서명자 송회근이 성주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파리장서가 발각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구 지역의 서명자들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대구 지역 출신 서명자]

파리장서에 서명한 인물은 학맥으로 보면, 김흥락 학맥에는 이종기, 전우·서찬규 학맥에는 서건수·우하교, 서찬규 학맥에는 우하삼·우성동·우경동·박순호·우승기, 전우 학맥에는 우찬기, 송병선 학맥에는 김용호가 있고, 이복래·조석하·박재근은 불명이다. 이들 가운데 서명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서건수[1995년 건국포장], 우하교[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애족장], 우성동[1995년 건국포장], 우찬기[1995년 건국포장], 김용호[2003년 건국포장], 우경동[1995년 건국포장], 박순호[2004년 건국포장], 우승기[1995년 건국포장], 조석하[1995년 건국포장], 박재근[2009년 건국포장]이다.

[의의와 평가]

대구 지역은 영남 지역에서 성주[15명] 다음으로 많은 유림이 파리장서에 서명할 정도로 유림계의 독립청원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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