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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432
한자 無憂園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사회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조직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비밀 결사.

[설립 목적]

1940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의 비밀결사 무우원(無憂園)은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뒤 근심과 걱정이 없는 민족의 낙원을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무우원은 1940년 12월 1일 조형길(趙亨吉), 김병욱(金炳旭), 현영만(玄泳晩), 이형수(李亨洙) 등 4명이 대구 대봉동 이형수의 집에 모여 비밀리에 조직한 결사체였다. 무우원은 한국이 주권을 상실한 원인이 ‘정신적 허약성’ 때문이라고 진단한 뒤 불교사상을 근간으로 하여 경제적·문화적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독립을 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무우원’이라는 이름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근심과 걱정이 없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 뜻에서 비롯하였다. 무우원은 유태인처럼 경제의 힘을 길러 적을 물리쳐 잠자는 민족혼을 일깨워 보자고 하였다.

무우원은 총칙과 세칙을 만들고 총책임자인 집행위원장 아래 총무, 경제, 과학, 선전, 종교, 문예, 후생의 7개 부서를 두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조형길이 집행위원장, 현영만이 총무부장, 김병욱이 경제부장을 맡았다. 무우원은 당면 투쟁 목표를 내선일체(內鮮一體)와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지원병, 공출(供出), 징용(徵用) 등을 거부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이에 구성원들은 불교를 믿고 술과 담배를 금하며 조직원끼리는 친목 도모를 꾀하기로 하였다. 1940년 12월 9일과 10일에 조형길대구사범학교 기숙사에서 한글로 된 무우원의 취지와 규약[총칙과 세칙]을 김병욱에게 전달하고, 김병욱이 1940년 12월 26일에 달성군 성서면 면사무소에서 몰래 인쇄한 뒤 1941년 1월 초에 인쇄한 유인물 11부를 현영만에게 전하였고, 현영만은 유인물을 이형수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무우원조형길은 1940년 12월 말에 일본 도쿄로 가서 아사쿠사[淺革]에 있는 불교 전문학교에 다니면서 조직 확대에 힘썼고, 함경북도 출신의 강증룡(姜曾龍)과 평양 출신의 최수원(崔壽源)을 확보하였다. 1942년 9월에 최수원이 도쿄 지부장이 되고, 11월에는 강증룡이 사업부장이 되었다.

국내의 무우원 구성원인 김병욱, 현영만, 이형수 등은 1941년 3월 말에 대구사범학교를 수료하고 일선 초등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활동을 이어 갔다. 무우원은 경제적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저단금(貯丹金)’이라는 이름으로 운동자금을 마련하여 경제부장 김병욱에게 보내고, 그러면 김병욱은 저단금으로 소 8마리를 사서 달성군 하빈(河濱) 지방 농가에 입식시킬 계획을 추진하였다.

1941년 9월 하순에는 조형길이 도쿄의 숙소에서 문장 연구, 곧 ‘글공부’라고 제호를 붙인 한국어로 적힌 글을 당시 공산(公山)국민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이형수에게 보냈고, 이형수는 이것을 10부 인쇄하여 동지들에게 보냈다. 1943년 1월 3일 김병욱은 일본을 방문하여 강증룡의 숙소에서 조형길, 최수원 등과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병욱을 국내 책임자로 정하고, 향후 사업 계획을 협의하였다. 김병욱은 경제적으로 힘을 발휘하자면 최소한 1000만 원 이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43년 6월 20일, 일본 도쿄 강증룡의 숙소에서 조형길, 최수원 등이 만나 무우원의 도쿄지부 친목회가 열렸다. 이때 집행위원장 조형길은 “내선일체의 미명 아래 민족차별 대우와 고통, 부자유를 자행하고 있는 일본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서는 불교의 신앙으로 강고한 정신력과 우리 자신의 경제력을 길러야 한다”라는 격려사를 진행하였다.

무우원은 1943년 6월 무렵 일제 관헌에 발각되었다. 1943년 6월 25일에 이형수가 대구경찰서에 검거되었다가 곧 석방되고, 6월 29일에 김병욱대구경찰서의 일제 경찰에 붙잡히면서 일본 도쿄의 동지와 국내 각처의 회원들이 모두 구속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 가운데 최수원이 대구경찰서 3호 유치장에서 사망하고, 4명이 검찰로 넘어가 재판을 받았다.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조형길은 5년, 현영만은 3년, 김병욱은 3년 6월, 강증룡은 1년 6월을 각각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가운데 조형길은 1945년 6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무우원은 일제 말기의 전시 동원 정책이 강제되는 1940년에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로서 국내와 일본 도쿄에서 경제적·문화적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일제의 전시 동원 정책에 압박을 가하고, 일제 말기 민족운동을 고양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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