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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차가료감하동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375
한자 大邱借家料減下同盟
이칭/별칭 대구차가자치감하동맹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1년 9월 5일연표보기 - 대구차가료감하동맹 결성
성격 사회운동단체

[정의]

1931년 대구광역시에서 주택 임대료 인하를 위하여 결성한 사회단체.

[개설]

대구차가료 감하동맹은 1931년 9월 5일 대구의 조양회관에서 유지와 시민 100여 명이 주택과 토지 임대료 인하를 목적으로 창립한 단체였다.

[역사적 배경]

대구차가료감하동맹이 결성되는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따른 전쟁 특수로 호황 경기가 일어나 주택과 토지 가격이 크게 상승한 이후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경기 불황의 상황에서도 주택과 토지 임대료가 내리지 않고 여전히 고율이 유지된 것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경과]

대구차가료감하동맹은 창립 총회에서 1929년을 기준으로 삼아 주택 임대료는 4할, 토지 임대료는 5할 인하를 목표로 하였다. 대구차가료감하동맹은 창립 총회에서 20명의 교섭 위원과 고문을 선정하였다.

대구차가료감하동맹은 1931년 10월 10일 위원회를 열고 사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교섭 위원 12명으로 교섭대를 조직하고, 대구시내를 4구역으로 나누어 주택 소유주와 지주를 만나 교섭하기로 하였다. 대구차가료감하동맹은 1932년 1월 20일 조양회관에서 제2회 정기 대회를 열고 그동안의 주택 소유주와 지주를 대상으로 한 교섭 결과를 놓고 목표 인하율을 유지할 것인지 또는 낮출 것인지에 대해 논의한 결과 주택 임대료는 2할, 토지 임대료는 3할로 목표 인하율을 조정하였다.

대구차가료감하동맹은 1932년 4월 무렵 가입한 회원이 1,500명에 이르고, 회비가 300원에 달할 정도로 조직이 크게 확장되었다. 때에 따라서는 하루에 회원 45명에 가입할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대구차가료감하동맹의 회원 급증은 1930년대 전반기에 경기 불황이 상당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대구차가료감하동맹은 1932년 5월 15일 조양회관에서 450명이 모인 가운데 정기총회를 열고 향후 활동 계획을 결의하였다. 정기총회에서는 위원장을 홍운정(洪雲禎)에서 조주영(趙柱泳)으로 교체하고, 홍운정은 부위원장이 되었다.

[결과]

대구차가료감하동맹은 큰 호응을 얻기는 하였지만 당국의 정책 차원이 아닌 시민운동 차원에서 주택과 토지 임대료의 적정 인하를 장기적으로 이루기는 쉽지 않은 과제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차가료감하동맹은 대구를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사회 문제가 된 도시의 고율 주택 및 토지 임대료를 낮추어 일반 시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천한 자발적 시민운동으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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