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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진위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374
한자 大邱鎭衛隊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0년 7월연표보기 - 대구진위대 설치
해체 시기/일시 1907년 8월연표보기 - 대구진위대 해산
성격 군사조직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에 설치된 지방 군대.

[설립 목적]

1895년(고종 32) 9월 설치된 진위대(鎭衛隊)는 부(府)나 군의 주요 지방에 주둔하여 지방의 질서유지와 변경을 수비하는 일을 주요 임무로 하였던 근대적 지방 군대이다.

[변천]

1895년 9월 13일 「육군편제강령(陸軍編制綱領)」[칙령 제170호]에 따라 중앙은 친위대와 시위대를, 지방은 진위대를 설치하였다. 당시 진위대가 설치된 지방은 평양과 전주뿐이었고, 진위대가 없는 지방에는 지방대(地方隊)가 설치되었다. 1900년 7월 대한제국 원수부는 지방의 진위대와 지방대를 합쳐 진위대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하였다. 진위대는 6개 연대와 18개 대대로 재편되었고, 진위대 제3연대의 제3연대 본부와 제1대대는 대구, 제2대대는 진주, 제3대대는 경주에 설치되었다.

1905년 4월부터 진위대의 18개 대대를 8개 대대로 감축하였고, 진위대 제3연대의 대대는 대구에만 남았다. 이때부터 제3연대의 대대를 대구진위대(大邱鎭衛隊)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대구진위대는 경정(京町)[현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2가], 대구진위대의 연병장은 덕산정 34번지[현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 대구측후소 아래에 있었다고 한다. 1907년 8월 일제에 의하여 한국 군대가 해산되면서 대구진위대도 해산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이후 대구에 주둔한 일본 수비대는 달성 토성을 야전지로 사용하였다. 대구진위대와 일본 수비대의 충돌은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실제로 1904년 4월 대구진위대와 일본 수비대가 충돌할 기미를 보이기도 하였다.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대구진위대를 의병 운동을 탄압하고 의병을 색출하는 데 동원하였다.

1906년 5월경부터 경상북도 봉화군 서벽사(棲碧寺)·각황사(覺皇寺) 및 안동군 춘양면(春陽面) 등지에서 신돌석·유시연 부대 소속 의병들은 관군을 격퇴하거나 광산(鑛山)에 주재하는 일본인들을 총살하였다. 1906년 6월 대구진위대 80명, 안동진위대 20명, 경주진위대 30명은 각황사에 머물고 있던 의병 120명, 안동 춘양면에 머물고 있던 의병 700여 명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사로잡힌 의병은 대구진위대 연병장에서 총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1907년 경상북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의병 하덕근(河德根)도 영해에서 체포되어 대구진위대의 주둔지[대구진위대 연병장으로 추정]에서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구진위대는 개항기 대구 및 경상도의 질서유지와 수비를 목적으로 설치된 근대적 지방 군대였으나 일제에 동원되어 의병을 진압하고 색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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