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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범학교 다혁당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87
한자 大邱師範學校 茶革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1년 2월 15일연표보기 -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결성
해체 시기/일시 1941년 7월 말연표보기 -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와해
성격 비밀결사
설립자 대구사범학교 학생들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 결사.

[개설]

대구사범학교 다혁당(大邱師範學校茶革黨)대구사범학교 심상과 9기생 권쾌복(權快福)[당수]·배학보(裵鶴甫)[부당수]·최영백(崔榮百)[총무부장]·이동우(李東雨)[문예부장]·이도혁(李道赫)[운동부장]·김성권(金聖權)·문덕길(文德吉)·최태석(崔泰碩)·이종악(李鍾岳)·박호준(朴祜雋)·김효식(金孝植)·조강제(趙崗濟)·이홍빈(李洪彬)·문홍의(文洪義)·유흥수(柳興洙)·이주호(李柱鎬)·서진구(徐鎭九) 등이 항일운동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기 위하여 1941년 2월 15일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설립 목적]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은 일제가 반드시 패망할 것이라는 정세 판단 아래 학술 연구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군사훈련을 통하여 독립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39년 7월 경부선 복선화 공사에 강제 동원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의 민족 차별에 항거한 사건인 왜관사건(倭館事件)으로 선배들이 대거 퇴학을 당하자 대구사범학교 9기생 20명이 왜관초등학교 앞 낙동강 백사장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백의단(白衣團)을 결성하였다. 이후 대구사범학교 8기생을 주축으로 1940년 대구사범학교 문예부(文藝部), 1941년 대구사범학교 연구회(硏究會) 등 비밀결사가 조직되었는데 대구사범학교 다혁당과 서로 연관을 가지며 활동하였다.

8기생들의 졸업으로 유지가 어려워지자 백의단을 해체하고 권쾌복·배학보·유흥수 등이 동기생들을 규합하여 ‘다혁당’을 조직하였다. ‘다혁당’이라는 명칭은 이홍빈의 제안에 따른 것으로, 영웅은 갈색 또는 흙색인 다색(茶色)을 좋아한다는 뜻에서 ‘다’를 따오고, ‘혁’은 혁명을 의미하였다.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은 표면으로는 문예 창작, 학술 연구, 사람다운 사람 등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학술을 통하여 독립 역량을 심화시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은 목적 달성을 위하여 당원 규약을 마련하였다. 첫째, 비밀 엄수, 둘째, 매월 2회 회합과 당수와 부당수 및 각 부장은 매주 1회 이상 회합, 셋째, 당원은 당수의 명령에 절대복종, 넷째, 정당원은 결단식에 참가한 자에 한함 등이었다.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의 조직은 당수와 부당수 아래에 총무부·문예부·예술부·운동부 등 4개 부서를 두고, 다시 4개 부서 아래에 각 분야 책임자를 두었다.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은 우리글로 된 역사서와 문화 서적을 읽고 토론회를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고 하급생을 지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항일 의지를 강화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뿐만 아니라 군사적 행동을 취하여야 할 때를 대비하여 군사훈련을 시행하였다.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은 축구와 같은 운동을 통하여 학교 교류를 시도하면서 민족의식을 공유할 계획이었다. 방학 때는 각자의 고향에 야학을 개설하여 우리글과 우리 문화를 보급하여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 활동도 벌일 계획이었다.

1941년 7월 말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충청남도 홍성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정현(鄭鉉)이 가지고 있던 『반딧불』이 일제 관헌에 발각되면서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의 실체도 발각되었다. 『반딧불』은 대구사범학교 문예부에서 발행한 민족의식이 담긴 기관지였다. 결국 대구사범학교 다혁당은 결성된 지 5개월여 만에 와해되고 말았고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당원을 포함한 300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1943년 2월 예심을 거쳐 1943년 12월 최종 판결에서 35명이 징역 5년에서 2년 6월까지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가운데 서진구는 광복을 맞이하지 못하고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의의와 평가]

1940년대 학생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대구사범학교 다혁당 사건은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항일운동이 침체된 시기에 벌어진 운동으로, 대구 지역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민족운동으로 높이 평가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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