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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미곡거래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66
한자 大邱米穀去來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32년 1월연표보기 - 대구미곡거래소 지정
해체 시기/일시 1939년 9월연표보기 - 대구미곡거래소 폐쇄
성격 기관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인가의 경상북도 지역 미곡거래소.

[개설]

대구미곡거래소는 경상북도 지역의 쌀 실물거래 및 선물거래를 할 수 있도록 설립된 미곡 유통기구였다.

[설립 목적]

대구미곡거래소는 일본의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한 미곡 생산과 벼의 집중화, 자본주의 양식에 의하여 대규모로 가공된 미곡을 신속하게 이출(移出)할 수 있게 하는 미곡 유통기구였다.

[변천]

대구의 미곡상들은 1914년 9월 총독부가 미곡 유통을 위하여 발포한 시장규칙에 의거하여 미곡거래소[미곡취인소]를 설립하기 위한 활동을 펼쳤다. 대구의 미곡상들은 1923년 2월 취인소설립기성동맹회를 결성하고, 대표를 뽑아 총독부에 보내 교섭하도록 하고, 또 다른 대표 세 명을 선발하여 일본 도쿄로 파견하였다.

취인소설립기성동맹회는 1923년 3월 7일 대구좌에서 미곡거래소 설립을 위한 대구시민대회를 개최하고, 일본인 6명과 서상일을 포함한 7명의 실행위원을 선정하였다. 대구시민대회에서 선언서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한국인 미곡상들은 1923년 3월 25일 만경관에서 거래소 설립을 위한 연설대회를 개최하고, 7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였다. 하지만 대구 미곡상들의 바람과는 달리 총독부는 부산이나 군산에 비하여 미곡 거래량이 적다는 이유를 들어 부정적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미곡거래소는 1932년 1월 총독부의 「조선취인소령 시행규칙」 제4조에 따라 경상북도를 관할 지구로 지정받았다. 이에 대구미곡거래소는 실물거래와 선물거래를 모두 할 수 있게 됨으로써 대구 미곡상의 숙원을 해결하였다.

대구미곡거래소는 설립인가 직후 초대 임원 선거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민족별 구성을 놓고 갈등이 일어났다. 임원에 세 명의 조선인이 선출되면서 갈등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대구미곡거래소의 임원 구성은 한국인의 바람과는 달리 일본인이 주축이었다. 대구미곡거래소는 전시 통제 경제의 여파로 1939년 9월부터는 문을 닫았다.

대구미곡거래소 임원은 이사장 하마사키[濱岐喜三郞], 상임이사 오카베[岡部駿策], 부이사장 한익동, 이사 다카다[高田眞豊], 다카키[高木昌治], 야와다[八幡八和太], 야츠오[八尾恭三], 사카모토[板本埈資], 시마다[島田金四郞], 서상현(徐相鉉), 감사 서상일(徐相日), 하카사키[濱岐利三郞], 츠지[辻邦米]로 이루어졌다.

[의의와 평가]

대구미곡거래소 설치는 대구 미곡상의 숙원사업이 해결되는 것이었고, 개항지가 아닌 내륙에 설치되었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 미곡의 유통과 거래량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구미곡거래소에서 거래되는 미곡의 최종 도착지는 일본이었기에 식민지 산업구조의 전형을 이루는 것이기도 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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