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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매일신문 피습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64
한자 大邱每日新聞 被襲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55년 9월 13일 - 대구매일신문 피습사건 『대구매일신문』에서 정부의 학생 관제 동원 비판 사설 게재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5년 9월 14일연표보기 - 대구매일신문 피습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956년 6월 18일연표보기 - 대구매일신문 피습사건 종결
성격 필화사건
관련 인물/단체 자유당|국민회|임병직|최석채|김민|홍영섭|대구매일신문

[정의]

1955년 9월 14일 『대구매일신문』의 정부 비판 사설에 불만을 품은 청년들이 대구매일신문사를 습격하고 주필이 구속된 필화사건.

[개설]

1955년 9월 13일 『대구매일신문』은 정부를 비판하는 논조의 사설 한 편을 실었다. 1955년 9월 12일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주 유엔 대사[공식 명칭 주 유엔 대한민국 대표부 특명전권대사]인 임병직(林炳稷)의 대구 방문 시 학생들을 관제 동원한 일을 비판한 사설이었다. 사설이 게재되자 우익 세력과 관변 단체를 중심으로 『대구매일신문』의 사설을 이적행위로 비판하고 나아가 집필자인 주필 최석채(崔錫采)의 파면 요구가 잇따랐다. 대구매일신문사는 우익 관변 단체에게 피습되어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고 주필 최석채는 파면, 투옥되었다.

[역사적 배경]

1955년 9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초대 주 유엔 대사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하였다. 당시 학생들은 아침 8시 30분경부터 길가에서 비행기가 도착하는 12시까지 폭염 속에 4시간이나 서 있었다. 1950년대 이승만 정부는 각종 관제 행사에 주로 중고등학생들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의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다.

[경과]

대구매일신문사 주필이자 편집부장 최석채는 1955년 9월 13일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관제 데모에 학생을 동원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논설이 게재된 당일 “대구매일의 이적행위를 규탄한다”, “대구매일 사설 필자 최석채를 처단하라”라는 벽보가 대구 곳곳에 나붙었다. 1955년 9월 14일 오후 1시 20분 대구국립극장에서는 대한독립촉성대구국민회, 한국부인회 등 관변단체 회원, 중고등학생, 대학생 등 3,000여 명이 『대구매일신문』의 사설에 대한 성토대회를 열고, 최석채의 사설을 이적행위로 규정하고, 『대구매일신문』 정간과 집필자 처단을 주장하였다.

1955년 9월 14일 아침 대구국민회 경상북도본부는 “사설 중 문제된 일부를 취소, 집필자를 처단하고, 사과문을 대구 시내 4개 일간신문에 게재할 것”을 요구하는 통고문을 대구매일신문사에 보냈다. 대구매일신문사가 대구국민회 경상북도본부의 통고를 묵살하자, 오후 4시 25분 대구국민회 경상북도본부 총무부 차장 김민(金民), 자유당 경상북도 감찰부장 홍영섭(洪英燮)은 탈취한 시영버스 402호에 20여 명을 태워 대구매일신문사로 쳐들어 왔다. 해머와 곤봉 등 흉기를 갖고 와 통신 시설, 인쇄 기계, 인쇄된 신문, 신문 인쇄에 필요한 각종 집기 등을 탈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연판부장 우종구는 안면이 파열당하고, 직원 8명이 부상당하였다.

한편, 대구매일신문사는 1955년 9월 14일 3시 15분에 피습 사태가 발생할 거라는 정보를 사전 입수하여 남대구경찰서[현 남부경찰서]에 연락하였다. 그러나 남대구경찰서에서는 형사 2명만 파견하였을 뿐이다. 결국, 경찰서의 미온적 대처로 인하여 대구매일신문사는 큰 피해를 당하였다.

[결과]

국회에서는 대구매일신문피습사건 진상조사단이 결성되었다. 국회 신상조사단의 조사 과정에서 경상북도청 사찰과장은 “백주 대낮에 일어난 테러가 무슨 테러요?”라고 말하면서, 피습을 주도한 세력을 두둔하였다. 여당인 자유당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대구매일신문피습사건 조사단장 최창섭은 한발 더 나아가 “애국심에 불타서 테러를 한 청년에게 국가가 훈장을 주어야 하며, 법적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자유당 박순석 의원은 대구매일신문피습사건을 ‘의거’라고 평하였다.

자유당 국회의원의 발언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임병직 대사가 학도를 동원한 일, 대구매일신문사 사옥을 습격한 일은 애국이냐?’, ‘국가와 정부의 구별조차 정확히 할 줄 모르고 폭행과 의거를 혼동하고 있다’라는 논조의 신문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그럼에도 진상조사단이 조사한 보고서는 제출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대구매일신문』 주필 최석채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었지만, 피습을 주도한 홍영섭과 김민은 기소중지되었다. 1955년 12월 15일 여론 압박으로 인하여 홍영섭과 김민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되었다. 결국 김민은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56년 6월 8일 대법원이 최석채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사건은 종결되었다.

[대구매일신문 피습과 최석채]

최석채(崔錫采)[1917~1991]는 호는 몽향(夢鄕)이며,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에서 태어났다. 1950년대 중반부터 언론사에 재직하면서 언론 자유를 위한 활동을 하였다. 최석채의 사설로 인하여 대구매일신문사가 피습당하자 최석채는 세계가 주목하는 언론인이 되었다.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IPI]는 ‘20세기 언론 자유 영웅[Press Freedom Hero] 50인’에 최석채를 선정하고, 2000년 11월 프레스센터에 동판을 설치하였다. 2004년 4월 21일 최석채의 고향 김천에서는 직지문화공원 내 최석채 선생 기념비와 사설비를 세웠다. 2015년 9월 12일 대구매일신문 피습사건 60주기를 맞아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에서 ‘세계언론자유 영웅 50인-몽향 최석채 매일신문 주필 필화 사건[백주의 테러 사건] 60주년 실경 연극’이 펼쳐졌다.

[의의와 평가]

대구매일신문 피습사건은 1950년대 이승만 정부의 언론 탄압이 드러난 대표적 사건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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