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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도로위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60
한자 大邱道路委員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6년 11월연표보기 - 대구도로위원회 조직
성격 기관단체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의 일본거류민회가 대구읍성 자리에 도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구성한 조직.

[설립 목적]

대구도로위원회는 1906년 11월에 대구 일본인 거류민단대구읍성을 철거한 뒤 읍성 자리에 도로를 건설할 목적으로 구성한 조직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도로위원회는 1906년 11월 15일 무렵 대구 일본인 거류민단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대구도로위원회대구읍성 4개의 문에 각 세 명씩 모두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동문은 오쿠라[小倉武之助], 요시다[吉田壽一郞], 오쿠보[大久保太三郞], 북문은 마치다[町田久五], 요시다[吉田佐七], 가미모리[神守源三郞], 서문은 이와세[岩瀨靜], 도쿠라[戶倉十六], 나카에[中江五郞平], 남문은 마쓰다[增田虎太], 가와이[河井朝雄], 세노오[妹尾久太郞]로 이루어졌다.

대구도로위원회는 1906년 11월 18일 제1회 위원회를 열고 도로 건설과 관련된 의안을 논의하였다. 첫째, 북문 밖과 동문 밖의 도로 개통에 관한 사항, 둘째, 역전 도로 폭 결정에 관한 사항, 셋째, 성벽 파괴 작업 청부에 관한 사항이었다. 첫째 안은 원안대로 결의하였다. 둘째 안은 8폭 도로와 6폭 도로 등 두 개의 안 중 논의 끝에 6폭 도로로 결정되었다. 셋째 안의 실행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 일본인 사회 내부의 갈등이 싹트는 계기가 되었다. 이유는 대한제국 정부가 읍성 철거에 반대 의견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읍성 철거를 반대함에 따라 대구도로위원회는 성벽 파괴 강행과 유보로 나뉘었다. 그러나 일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읍성 철거의 명의인인 이토 겐타로[伊藤原太郞]가 부산으로 간 뒤 나타나지 않으면서 대구읍성 철거는 답보 상태에 빠졌다.

대구읍성 철거는 경상북도관찰사 서리 박중양(朴重陽)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대구읍성이 철거되자 대구도로위원회는 1907년 3월 무렵 대구 일본인 거류민단이 마련한 5,000원으로 도로 공사에 착수하였다. 여기에 1908년 겨울 대구군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도로 건설비 1만 9949원을 교부받아 성벽을 허문 자리에 도로 건설에 착수하여 1909년 12월에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그에 따라 대구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의 이름을 가진 도로가 만들어졌다.

[현황]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는 지금도 대구의 중심 도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대구도로위원회는 러일전쟁 이후 을사조약을 계기로 대구에 침투한 대구 일본인 거류민단이 구성한 조직이다. 대구읍성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도로를 건설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대구읍성 철거는 친일 관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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