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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한약업자 조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211
한자 大邱 漢藥業者 組合
이칭/별칭 대구한약업조합,대구한약상조합,대구한약조합,대구한약자조합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06년연표보기 - 대구 한약업자 조합 설립
성격 경제단체

[정의]

개항기 대구광역시에 있었던 한약업 조합.

[설립 목적]

대구 한약업자 조합(大邱漢藥業者組合)대구부(大邱府)[현 대구광역시] 내 한약종상(漢藥種商)들이 대구 약령시(藥令市)의 진흥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대구 한약업자 조합은 대구한약상조합, 대구한약업조합, 대구한약자조합, 대구한약조합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변천]

1906년 설립된 대구 한약업자 조합 회장은 김내명(金乃明), 부회장은 이경재(李庚宰), 회계는 신태문(申泰文), 평의원은 김상집(金相集) 외 11인이었다. 1658년(효종 9)부터 경상감영의 객사(客舍)인 달성관 주변에서 봄과 가을 두 차례 열리던 대구 약령시가 일제의 감시로 인한 생산자와 상인들의 활동 제약과 1914년 일제가 공포한 「조선시장규칙」에 의한 규제로 크게 위축되었다.

1923년 대구 약령시의 지도자 양익순이 주체가 되어 대구 한약업자 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이칭 대구영시진흥동맹회, 대구약령시진흥동맹회]를 창립하였다.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는 약령시의 발전과 동업자 구제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약령시 진흥기성동맹회는 공정거래, 상업 금융, 운임 특혜 등 약령시의 부흥을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대구 한약업자 조합은 창립 후 20여 년 동안 대구 약령시와 한약계에 많은 공헌을 하였지만 1920년대 후반 들어 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구 한약업자 조합의 조합원들은 대구 한약업자 조합의 개신과 부흥을 위하여 대구부 남성정[현 중구 남성로] 하재영(河在영)의 집에서 ‘대구 한약업자 조합 총회’를 열어 규칙을 개정하고 약령시 진흥에 대하여 논의한 뒤 임원을 새로 선출하였다. 대구 약령시와 한약계를 위하여 활동하던 대구 한약업자 조합은 해방 후까지 존속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대구 약령시는 주로 당재(唐材)를 직수입하거나 서울에 있는 중국인 약종 전문상을 통하여 수입하였다. 수입산 약재는 대구 약령시의 새로운 수입원이 되었다. 1930년대 중후반 대구 약령시에서 1년 동안 판매되는 금액이 약 400만 원을 넘어섰을 정도였다. 대구 한약업자 조합은 1930년대 중반 이후 매년 12월경 대구상공회의소의 후원으로 특별 시장을 개최하여 신약재를 판매하면서 대구 약령시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수출입품등임시조치법(輸出入品等臨時措置法)」이 공포되면서 약재 수입 경로가 모두 막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938년 대구 한약업자 조합은 한약재 수입허가를 위하여 조선총독부에 진정서를 넣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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