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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6·10만세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196
한자 大邱 六·十萬歲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6년 4월 26일연표보기 - 대구 6·10만세운동 발생
성격 사회운동

[정의]

1926년 4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사망 이후 대구에서 일어난 운동.

[개설]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망국의 설움을 안은 채 살아가던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이 폭발하였다. 전국 각지의 상인들은 철시를 통하여 투쟁하였고, 학생들은 동맹휴교를 결의하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전국 각지에서는 망곡단(望哭團)과 봉도단(奉悼團)이 조직되어 순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을 기하여 3·1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개한 제2의 만세운동인 6·10만세운동이 학생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경과]

대구에서는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1926년 4월 26일부터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애도를 표하였다. 대구 시내의 상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극장은 음악과 춤 공연을 중지하였으며 음식점은 휴업하였다. 대구 사립 신명여학교[현 신명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일제히 검은 댕기에 흰옷을 입게 하였고, 여타 사립 여학교와 공립 여학교에서도 검은 댕기를 드리는 등의 방법으로 조의를 표하였다.

1926년 4월 29일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중고등학교] 학생 100여 명은 오후 수업을 중단하고 달성공원에서 망곡식(望哭式)을 하고 5월 9일까지 동맹휴학을 결의하였다. 동맹휴학을 결의한 이유는 대구의 다른 학교들은 모두 봉도식((奉悼式)을 거행하는데 대구고등보통학교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동맹휴학 결의 사건으로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3명이 일제 관헌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1926년 5월 1일에는 대구 달성공원망경루(望京樓)에 2만 명이 모여 성복제(成服祭)를 지냈고, 성복제에 이어 각 학교 학생들의 망곡식이 있었다. 순종의 인산일인 1926년 6월 10일이 다가오자 일제 관헌은 대대적인 검거와 압수수색을 통하여 대구의 각 학교와 사회 및 사상단체의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고 탄압하였다.

[결과]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한 제2의 만세운동이었으나 대구 6·10만세운동은 일제 관헌의 탄압으로 만세운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고 수만 명이 참여한 망곡과 봉도는 계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대구 6·10만세운동은 일제 관헌의 대대적인 검거와 압수수색으로 사전에 차단되었다. 6·10만세운동 이후 대구 지역 학생들은 독서회와 비밀결사 등을 결성하고, 식민지 교육정책에 맞서 동맹휴학을 실행하는 등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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