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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노동당대구시위원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183
한자 南朝鮮勞動黨 大邱市委員會
이칭/별칭 남로당대구시위원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6년 9월 27일연표보기 - 남조선노동당대구시위원회 결성
성격 기관단체
설립자 조선공산당 대구시위원회|조선인민당 대구지부|조선신민당 대구지부

[정의]

1947년 대구광역시에서 결성된 남조선노동당 소속 조직.

[개설]

1946년 9월 23일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 등은 3당 합당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합당을 의결하였다. 조선인민당 대구지부최문식은 합당 문제에 관한 기자들과의 대담을 통하여 “중앙에서 합당이 결정되었으니 상향식 합당이 순서이며, 3당 합당에 대하여 의견 대립이 없었다”라고 밝혔다. 3당 합당과 관련하여 분열 없이 3당 모두 합당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1946년 9월 27일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 등 3당의 대구지부가 합당하여 남조선노동당[남로당] 대구시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대구의 좌익 중 최원택(崔元澤)은 대구를 떠나 남조선노동당 중앙감사위원장을 지냈다. 더욱이 조선공산당 내의 간부파가 대회파를 누르고 절대 다수를 형성하고 있던 대구·경상북도의 공산당원은 남조선노동당대구시위원회의 결성이 다른 지역보다 이른 만큼 일원적인 조직력을 과시하였다. 한편 남조선노동당대구시위원회와 깊이 연관된 남조선노동당 경북도위원회는 1947년 2월 14일 이목, 채충식, 이선장, 백기만, 박종조, 이지화, 백현우, 조봉석 등이 결당 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뒤 1947년 3월 16일 이상훈을 위원장으로 하여 출범하였다.

[설립 목적]

남조선노동당은 1946년 8월말 북한 지역에서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된 것을 계기로 남한에서도 좌익 세력을 총결집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남조선노동당대구시위원회(南朝鮮勞動黨大邱市委員會)는 1947년 3월 1일 광복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3·1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달성공원에서 3·1절 기념 삼상결정실천시민대회[좌익]를 개최하였다. 1947년 3월 22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약칭 전평]의 주도로 ‘24시간 총파업투쟁’을 벌인 3월 총파업과 관련하여 남조선노동당대구시위원회김관제(金觀濟), 유지명(柳志明), 이선장(李善長), 신학균(申學均), 박중조(朴重朝) 등이 3월 22일부터 3월 23일에 걸쳐 제5관구 경찰서에 의하여 검거되었다. 남조선노동당대구시위원회는 1947년 7월 27일 민족주의민족전선[민전]이 달성공원에서 개최한 미소공동위원회 속개 축하 및 임시정부수립촉진시민대회와 연관되었다.

남조선노동당은 1948년 2월 7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내한 반대 투쟁을 위한 2·7구국투쟁[일명 2·7파업]을 지도하였다. 남조선노동당은 이후 단독선거 반대 투쟁을 전개하고, 정부 수립 뒤에도 야산대, 파업, 각종 사회조직 내 세력 형성 등의 활동을 통하여 한국 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을 이어 갔다. 다른 한편 이상훈처럼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참가하고, 북한에 남는 경우도 있었다. 남조선노동당은 1949년 6월 30일 북조선노동당과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으로 전환 뒤에도 계속 활동을 이어 가고 있었고, 정부는 좌익 검거 등을 통하여 세력을 제거하여 나갔다. 그런데 신문 보도에서는 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음에 불구하고, 좌익 관련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여전히 ‘남조선노동당’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의의와 평가]

남조선노동당대구시위원회는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안인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재개를 촉구하면서, 단독선거·단독정부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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