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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당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78
한자 -黨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28년 4월 - ㄱ당 사건 무력 항일 투쟁을 위한 비밀결사 조직 결의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8년 5월 20일연표보기 - ㄱ당 사건 비밀결사 조직 ㄱ당 조직
전개 시기/일시 1928년 6월 11일 - ㄱ당 사건 ㄱ당 당원 곽동영과 노차영, 김교식에게 독립운동 자금 요구하다 실패
전개 시기/일시 1928년 7월 24일 - ㄱ당 사건 ㄱ당 당원 전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구 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
종결 시기/일시 1928년 8월 2일연표보기 - ㄱ당 사건 ㄱ당 당원 전원 불기소 처분
발생|시작 장소 ㄱ당 사건 시작 장소 -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공원로 35[달성공원]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곽동영|노차용|이상쾌|이강희|문상직|장택원|정대봉|이상화|유상묵|오진문

[정의]

1928년 대구에서 노차용(盧且用), 장택원(張澤遠), 정대봉(鄭大鳳), 문상직(文相直) 등이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무장투쟁을 목표로 비밀결사를 조직한 사건.

[개설]

ㄱ당 사건은 무장 항일 투쟁을 위하여 대구에서 조직된 비밀 결사 사건이다.

비밀결사의 이름은 ‘미회(未會)’, ‘바바군’, ‘ㄱ당’ 등이 논의되었으나 ㄱ당으로 결정되었다. ‘ㄱ’이 한글의 첫 글자이자 조선의 기원을 의미하기 때문인 동시에 ㄱ당 회원 외에는 조직명을 모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적 배경]

1920년대 국내 민족운동의 흐름 중 하나는 일제의 허가를 받은 합법단체의 성격을 띠면서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이 되면서 합법단체는 활동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실력양성운동으로는 민족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합법단체의 활동에 한계를 인식한 독립운동가들은 실력양성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합법단체에서 탈퇴하여 새로운 형태의 독립운동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경 신간회 대구지회대구청년동맹에서 활동을 하였던 노차용, 장택원, 정대봉, 문상직은 신간회근우회가 펼치고 있는 야학이나 강연회 등의 실력양성운동으로는 독립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독립운동 방략을 직접적인 무력투쟁으로 전환하여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경과]

노차용, 장택원, 정대봉, 문상직 등은 1928년 4월 하순 무렵 대구부 경정에 있었던 문상직의 하숙에서 민족운동의 부진을 개탄하면서 새로운 민족운동의 방향을 찾기로 결정하였다. 1928년 5월 초순 무렵 신간회 부산지회와 부산 노우회에서 활동하던 이강희(李康熙)와 독립운동을 위하여 전국을 누비던 유상묵(柳商黙)이 대구를 방문하자,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1928년 5월 18일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산격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냇가에서 모임을 갖고 비밀결사를 조직하려 하였으나 이강희와 문상직이 불참하여 구체적인 내용을 결정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1928년 5월 20일 오후 2시경 대구 달성공원에서 노차용, 장택원, 정대봉, 문상직, 이강희, 유강묵이 모여 ‘ㄱ당’이라는 결사 명칭, ㄱ당의 목적과 강령, 임원 등을 결정하였다. 이날 선임된 임원은 재무부에 노차용·장택원, 조사부에 이강희·유상묵, 연구부에 정대봉·문상직이었다. 또한, 다음 회합 날을 1928년 6월 22일로 결정하고 다음 회합에서는 중국에 보낼 독립운동가 모집 방법, 당의 방책 등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ㄱ당은 중국 광둥의 군관학교(軍官學校)에 청년들을 유학시키고 독립군을 양성하고, 만주 방면의 미간지를 개간하여 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대구와 인근 지역 일대의 조선인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확보하기로 하고, 1928년 6월 11일 노차용곽동영이 달성군 해안면 둔산동 부호 김교식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교식이 군자금 내기를 거부하여 실패하고,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ㄱ당 당원 전체가 검거되었다.

[결과]

곽동영, 노차용, 이상쾌, 이강희, 문상직, 장택원, 정대봉, 이상화, 유상묵, 오진문 등 관련자 10명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928년 7월 2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현 대구지방검찰청]으로 송치되었지만, 1928년 8월 2일 대구 지방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일제는 ㄱ당 사건을 계기로 신간회 대구지회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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