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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55
한자 十月抗爭
영어공식명칭 People’s Uprising in October 1946
이칭/별칭 10월 인민 항쟁,대구 10·1 사건,대구 10월 사건,영남 10월 사건,대구 소요,영남 소요,대구 폭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46년 10월 1일연표보기 - 10월 항쟁 시작
성격 사회운동

[정의]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하며 시작된 대규모 민중 항쟁.

[개설]

10월항쟁은 미군정의 친일 관리 고용, 식량정책의 실패 등에 항의하며 대구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발생하였다. 경찰의 발포로 대구 시민 수백 명이 희생되었고,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되며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농민뿐만 아니라 노동자, 학생, 지식인 등 다양한 계층과 계급이 함께 참여한 10월항쟁에 대한 명칭은 크게 폭동, 소요, 항쟁, 사건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1946년 당시 미군정은 ‘소요’로, 우익은 ‘폭동’으로, 좌익은 ‘항쟁’으로 규정하였다.

[역사적 배경]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 파업으로 시작된 9월총파업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대구에서도 철도노조 파업에 이어 우편국·섬유·출판 노조 등이 합세하였다. 9월 30일에는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상북도의 총파업에 30여 개 업체 총 4,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대구 9월총파업은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대구 지역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가 주도하였는데,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는 9월 27일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일사불란하게 대구 9월총파업을 이끌었다.

전국에서 9월총파업이 전개되는 가운데 1946년 10월 1일 대구역 일대에 철도·운수·화학·섬유 노동조합원 등 수천 명의 노동자가 ‘파업 요구 조건 관철’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연좌시위를 벌였다. 또한 수백 명의 굶주린 부녀자들이 모여 쌀을 달라고 하는 기아데모를 벌였다. 10월 1일 오후 6시 무렵 파업단과 권영석 제5관구 경찰청장이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 간판 철거를 놓고 협상을 벌였다.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풀고 철수하면 간판도 철거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경찰이 철수하는 와중에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한 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경찰의 발포 사건으로 다른 지역의 9월총파업이 경찰에 의하여 해산되거나 자연적으로 약화된 데 비하여 대구 9월총파업10월항쟁으로 이어졌다.

[경과]

10월 1일 늦은 저녁 민주주의민족전선대구시위원회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도위원회는 비상 대책 회의를 긴급 소집하여 10월 2일 총동원과 함께 경찰에 대하여 규탄하고, 책임을 추궁할 계획이었다. 1946년 10월 2일 대구의과대학[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중심으로 대구사범대학, 대구농과대학[현 경북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등 3개 대학 연합으로 대구경찰서 앞에서 시체데모를 벌였다.

시위대는 오전 10시 무렵 대구경찰서에 도착하여 중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대구경찰서를 에워싸고 연좌시위를 벌였다. 시위 학생의 규모는 1,500명에서 2,000명으로 추산되었다. 시체데모를 벌인 학생 대표들은 대구경찰서장 이성옥에게 경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그 뒤 미군정 관계자와 파업단 주요 간부 간에 ‘선 무장해제 후 해산’, ‘선 해산 후 무장해제’를 놓고 팽팽한 협상이 이루어졌다. 10월 2일 오전 11시 30분 무렵 대구경찰서 서장 이성옥은 경찰에게 모든 무기를 무기고에 넣도록 명령한 뒤 대구역에서 경계를 펼치고 있던 경찰에게 무기를 거두고 원대 복귀하라는 명령을 전달하였다.

한편 1946년 10월 2일 오전 10시 대구역 인근에서는 파업노동자와 경찰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0월 2일 오전 11시 무렵 대구역 경계 업무를 수행하던 무장경찰이 파업노동자와 시민을 향하여 발포하여 수십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10월항쟁은 경상북도 전역으로 번졌고 이어 전국 항쟁으로 이어졌다.

[결과]

10월 2일 오후 3시부터 미군정의 본격적인 시위대 해산 작전이 시작되었고, 10월 3일 좌익 세력에 대한 압수수색과 처벌이 내려져 11월 말까지 대구와 인근에서 2,000여 명, 경상북도 지역에서 7,500여 명이 검거되었고 6,500명은 1947년 1월 말까지 석방되었다. 나머지 피검자 중 280명은 군사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되었고, 5명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교도관의 수감자에 대한 가혹 행위를 둘러싼 시비가 끊이지 않았고 소위 ‘관제 빨갱이’가 대량으로 생겨났다. 1946년 10월 8일부터 특별 군정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부실 재판의 연속이었다.

[의의와 평가]

광복 후 전국이 공동으로 안고 있던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10월항쟁은 광복과 함께 변화되어야 할 식민지 시대의 정치·경제·사회구조가 미군정에 의하여 유지 혹은 재생산되는 것에 반대한 민중의 항쟁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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