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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대구의 잡지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48
한자 1920年代 大邱- 雜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헌|연속 간행물
관련 인물 이우백|김구정|대구제4청년회|정명준|경북연구회|경북과물동업조합

[정의]

1920년대 대구에서 발행이 추진된 다양한 잡지.

[개설]

3.1운동의 영향으로 인하여 일제는 식민 지배 정책을 무단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인의 한글[대체로 국한문혼용] 신문과 잡지의 발간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 잡지의 발행은 세계정세와 사조, 식민지 사회·경제 문제, 독립과 해방, 문학과 예술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식민지 조선의 실태와 전망을 제고할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였다. 잡지는 민족문제와 민주 의식을 고양하는 데 일조한 데 반하여 일제의 입장에서는 치안을 방해하는 요소로 파악하였다.

[사상 잡지]

1920년 전후 대구에서는 청년 유지 몇 사람이 만필 같은 글을 모아 만든 『신광(新光)』이 2호까지 발행되었다. 또 1921년 대구청년회(大邱靑年會)가 기관지로 『청년(靑年)』을 발행할 계획으로 원고 검열까지 갔으나 끝내 발행하지는 못하였다. 1924년 1월에는 이우백(李雨栢)과 김구정(金九鼎) 두 사람이 중심이 되어 봉산동에 사무소를 두고 월간으로 문예 잡지 『이상촌(理想村)』, 유년 잡지 『보(步)』의 발행을 추진하였다. 출판 허가는 1923년 12월 26일 제출하여 1924년 1월 30일에 창간호를 발행할 계획이었다. 집필진은 대구의 인사를 중심으로 하여 경향 각지의 명사를 망라할 방안이었다. 두 잡지는 1921년에 발행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발행하지 못하다가 1924년에 다시 추진한 것이었다. 또 『이상촌(理想村)』의 원래 제목은 『잣나무』였던 것으로 보인다. 1924년에는 독립운동가 정명준(鄭命俊)[1900~1959]이 잡지 『혁조(革潮)』의 발행을 추진하였다. 대구제4청년회도 1924년부터 잡지 형태의 기관지를 발행할 계획을 세웠다. 대구제4청년회는 1925년 1월에 기관지 『제4청년』을 1925년 3월 1일 창간호를 발행할 계획을 추진하면서, 책임 위원으로 현철(玄哲), 이달(李達), 한연순(韓連順), 이유덕(李有德), 윤우열(尹又㤠) 등 다섯 명을 선정하였다. 1925년 7월에는 서상일(徐相日), 서만달(徐萬達), 정운해(鄭雲海) 등이 몰락하여 가는 농촌의 상황을 조사 및 연구하여 농업의 개량 발달을 목적으로 설립한 대구농촌사(大邱農村社)도 1925년 10월에 월간 잡지 『농촌(農村)』 창간호를 발행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대구에서 발행이 추진된 잡지들의 대부분은 출판되지 못하였다. 일제 관헌이 불온한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농촌』 창간호에 대하여 일제는 기휘(忌諱)[꺼리고 싫어함]에 저촉된다 하여 원고까지 압수하는 탄압을 자행할 정도였다. 일제는 자신들이 출판을 불허한 잡지에 대하여 ‘사상 잡지’라고 이름을 붙였다.그 밖에도 대구와 경상북도에서 허가 신청을 하였으나 허가가 안 되어 출판되지 못한 출판물은 1919년 1건[문집], 1920년 4건[3건은 소설, 1건은 문집], 1921년 1건[족보], 1922년 1건[문예지 『원예』], 1924년의 조양춘의 『인간의 애(愛)』, 1926년 최세기의 『용촌(湧泉)』 등이 있었다.

[관변 및 일반 잡지]

1922년 9월 경상북도 도청이 중심이 된 경북연구회(慶北硏究會)가 발행한 잡지 『경북(慶北)』의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창간호의 내용은 권두언, 본지의 창간에 붙여 면(面)의 지도 및 감독, 경상북도의 공장 노동, 선인 아동의 성행과 가정, 입학난과 구제 시설, 면 행정의 우량 치적, 미신에 바탕한 선인의 범죄 등으로 채워졌다. 『경북』은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아래 도정(道政)을 선전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1916년 10월 설립된 경북과물동업조합에서는 『경북의 원예』를 발행하였다. 영남친목회는 기관지 『영남시보(嶺南時報)』를 발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대구의 잡지는 여려 형태로 발행을 추진하였으나 대부분은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발행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관변 단체나 일본인 발행의 잡지는 발행되었다. 결국 1920년대 대구에서 잡지 발행의 추진을 통하여 일제의 식민 지배 정책의 폭압적 성격이 여지없이 드러났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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