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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29
한자 喟火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박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변천 시기/일시 757년연표보기 - 위화군에서 수창군으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776년연표보기 - 수창군에서 위화군으로 개칭
성격 행정구역

[정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남구, 달성군 가창면 지역에 있던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

[개설]

위화군(喟火郡)은 현재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남구, 달성군 가창면을 관할하면서 주변의 현(縣)들을 거느린 757년(신라 경덕왕 16) 이전 신라의 지방 행정구역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 양주(良州) 수창군(壽昌郡) 조에 수창군은 본래 위화군(喟火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고려 때]의 수성군(壽城郡)이라고 되어 있다. 현재의 대구광역시 수성구[고산 지역 제외], 남구, 달성군 가창면에 해당하며 주변의 대구현, 팔리현, 하빈현, 화원현을 거느리고 있었다.

[명칭 유래]

‘위화(喟火)’라는 지명은 윗벌을 의미하며 그 자체는 오래되었겠지만, 위화가 군(郡)이 된 것은 삼국통일 이후로 추정된다. 그 전에는 오히려 달구화[대구]가 군의 중심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757년에 지명을 중국식[漢式]으로 개정할 때 위화군수창군으로 고쳤다. 776년(혜공왕 12)에 지명을 예전의 것으로 되돌렸는데, 대체로 신라 말까지 신구의 2개 지명이 병용된 듯하다. 『고려사』 지리지에서는 위화군을 일명 상촌창군(上村昌郡)이라고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삼국시대에는 대체로 같은 범위의 군이 있었을 것이고, 그 중심은 달구화였을 것이다. 즉 달구화군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참고로 신라에서 군제(郡制)는 늦어도 6세기 중엽에는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달구화에서 위화로의 중심 이동은 신문왕(神文王)의 달구벌 천도 시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시대 위화의 치소(治所)에 대해서는 성지(城址)와 고분군을 가지고 추정할 수 있는데, 용두산성이 관련된 성으로 추정되며, 대명동 고분군을 위화의 중심 고분군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참고로 대명동봉덕동은 원래 수성현(壽城縣)[위화군의 조선시대 지명]의 관할이었다.

[자연환경]

위화군은 현재 가창면에서 발원하여서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으로 들어가는 신천 상류 지역과 하류의 동쪽 지역에 해당한다. 동쪽은 장현(墻峴), 즉 담티고개를 경계로 경산과 접하고, 남쪽은 팔조령을 경계로 청도와 접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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