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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007
한자 大丘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집필자 박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변천 시기/일시 757년 - 달구화현에서 대구현으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776년 - 대구현에서 달구화현으로 개칭
변천 시기/일시 1419년연표보기 - 대구현에서 대구군으로 승격
성격 행정구역

[정의]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서구, 동구 일부, 북구 일부, 달서구 일부를 관할한 신라, 고려, 조선의 지방 행정구역.

[개설]

대구현(大丘縣)은 757년부터 1419년까지 신라, 고려, 조선의 지방 행정구역이다.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서구, 동구 일부, 북구 일부, 달서구 일부에 해당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 양주(良州) 수창군(壽昌郡) 조에 대구현은 본래 달구화현(達句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으며, 지금[고려 때]도 그대로 쓴다고 되어 있다. ‘대구현’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초 1419년(세종 원년)에 군(郡)으로 승격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명칭 유래]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지명을 중국식[漢式]으로 개정할 때 달구화현(達句火縣)대구현으로 고쳤다. 776년(혜공왕 12)에 지명을 예전의 것으로 되돌렸는데, 대체로 신라 말까지 신구의 2개 지명이 병용된 듯하다. ‘대구현’이라는 지명은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 초 1419년(세종 원년)에 군(郡)으로 승격할 때까지 사용되었다.

[형성 및 변천]

신라 통일기 주(州)-군(郡)-현(縣) 체제에서 양주(良州)[현재의 경상남도 양산시] 수창군에 소속되어 있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의 주현(主縣)-속현(屬縣) 체제에서 경산부(京山府)[현재의 경상북도 성주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1143년(인종 21)에 현령(縣令)을 파견하여 주현이 되었다. 이때 인근의 하빈현(河濱縣)화원현(花園縣)이 대구에 소속된 듯하다. 이 중 화원현은 다시 경산부로 이속되었다가 조선시대에 최종적으로 대구에 속하게 되었다. 또 조선 초에는 수성현(壽城縣)해안현(解顏縣)을 거느리게 되었으며, 특수 행정구역인 자이소(資已所)가 소속되어 있었다. 1419년에 1,000호(戶) 이상이 됨으로써 지방관을 지군사(知郡事)로 올려 대구군(大丘郡)이 되었다.

[자연환경]

대구현은 북쪽으로 흘러 금호강으로 들어가는 신천 하류의 서쪽 지역에 해당한다. 금호강이 북쪽과 서쪽으로 돌아 나가고 남쪽에는 앞산[658.7m]이 우뚝 솟아 있다.

[현황]

대구현의 영역은 조선 후기 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의 영역에서 속현인 수성현, 해안현, 하빈현, 화원현, 풍각현(豐角縣)의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조선 후기의 동상면, 동중면, 동하면, 서상면, 서중면, 서하하[달서], 서하면[성서] 정도로 파악할 수 있다. 현재의 대구광역시 중구, 서구, 동구 일부, 북구 일부, 달서구 일부에 해당한다.

대구현의 치소(治所)는 대구읍성 일대로 추정된다. 현재의 동성로, 서성로, 남성로, 북성로 자리에 있었던 대구읍성은 조선 영조 때 석성으로 축조한 것이다. 1590년(선조 23)에도 토성으로 된 읍성을 축조하였지만 왜군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달성토성에 해당하는 읍석성이 군 서쪽 2리에 있다고 한 점으로 보아 조선 초의 치소 역시 달성토성 동쪽 인근, 즉 읍성 내부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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