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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구벌 천도 계획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999
한자 達句伐 遷都 計劃
영어공식명칭 Capital Relocation Plan in Dalgubeol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
집필자 박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689년연표보기 - 달구벌 천도 계획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신문왕

[정의]

689년 신라 신문왕이 도읍을 지금의 대구 지역인 달구벌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한 사건.

[개설]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신문왕 9년(689) 조에 도읍을 달구벌(達句伐)로 옮기고자 하였으나 실현하지 못하였다[未果]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달구벌은 경덕왕 때 대구현(大丘縣)으로 고친 달구화현(達句火縣)을 말한다.

신문왕은 귀족세력을 대표하는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후, 시위부를 개편하고, 9서당과 국학을 설치하여 전제 정치를 뒷받침하는 왕권의 기반을 확충하였다. 그외에 왕족 김씨의 족내혼 실시, 9주 5소경 정비, 녹읍의 혁파와 관료전 실시 등 왕권을 확립하여 갔다. 신문왕은 이러한 정치개혁을 바탕으로 도읍을 달구벌로 옮기고자 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역사적 배경]

달구벌 천도 계획 혹은 시도는 기록이 매우 단편적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지만, 정치사 혹은 도성사의 관점에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먼저 정치사적인 관점은 신라 중대 전제(專制) 왕권이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달구벌 천도를 시도하였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실현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도성사의 관점에서 보는 논의는 다음과 같다. 신라는 삼국 통일 이후 당 장안성(長安城)을 모델로 한 격자형 계획 도시를 조성하고자 하였다. 전통 도시인 경주에서는 계획 도시 조성이 쉽지 않아 새로운 자리를 찾아 천도를 시도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 경우 비용 문제와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신료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고 본다.

[결과]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 노력은 막대한 비용 부담과 귀족들의 반발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689년에 중단되었다.

[의의와 평가]

중요한 것은 왜 대구가 천도지로 선정되었고, 천도 계획이 실제로 어느 정도 시행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대구가 천도지로 선정된 이유는 우선,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물류 상의 이점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구에서는 금호강 수운을 이용하여 영남 대부분 지역의 물자를 끌어들일 수 있다. 그리고 농경지인 달구벌 지역은 경주보다 넓은 분지 지역이어서 방어에 유리하기도 하였다. 또 하나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신천 좌우로 넓은 평지가 있어 당 장안성과 같은 도시 계획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도 계획은 어느 정도 시행되었을까? 지적원도(地籍原圖)를 보았을 때 수창군치(壽昌郡治)로 추정되는 수성초등학교 주변에서 약간의 정방향 도로와 토지 구획을 확인할 수 있다는 연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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