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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82
한자 詩- 都市, 大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주연

[정의]

대구광역시에서 주로 활동한 시인과 시작품 세계.

[개설]

시인 기형도가 대구를 가리켜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라고 표현했듯이, 대구광역시는 유독 시문학이 발달하여 왔으며 시인들의 주요 거처가 되고 있다. 대구를 대표하는 근대 시인으로 이상화이육사, 이장희, 박목월, 조지훈, 이호우, 김춘수를 들 수 있으며, 현대 시인으로 이성복, 장정일, 이하석, 이태수, 박남철, 송재학, 송찬호, 정호승, 문인수가 대표적이다.

[문학의 대나무숲을 이룰 죽순을 심다]

일제강점기의 억압에서 겨우 벗어난 무렵인 1946년 5월, 대구에서는 시 동인지 『죽순』이 창간되었다. 이윤수를 비롯한 죽순시인구락부대구 서문로 동산파출소 옆에 있던 명금당(名金堂) 시계포 기둥에 ‘죽순’ 간판을 내걸었다. 1946년은 좌우익의 대립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기였다. 특히 대구는 ‘한국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이념 투쟁이 격렬하였다. 산업시설이 생산을 중단한 상태에서 이제 막 창간된 『죽순』은 당장 책을 인쇄할 종이조차 구하기 힘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종이를 구하여 인쇄에 들어가면, 이번에는 전력이 공급되지 않아 석유 램프를 밝히고 발로 인쇄기를 돌려가면서 작업을 하였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이윤수는 원고의 편집과 교정은 물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배송까지 도맡아 하였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시 동인지 『죽순』은 이런 어려움 끝에도 살아남았다.

『죽순』이 발간되는 ‘명금당’은 오갈 데 없는 허전한 문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였다. 외지의 문인들이나 예술인들이 대구에 오면 자연스레 명금당을 찾았고, 작은 시계포 가게 안은 언제나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시인 이정호는 이를 두고 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파리의 카페’ 같다며 탄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1947년 9월의 어느 날, 김소운이 가을비를 맞으면서 명금당을 찾아와서는 죽순 동인들과 인사를 나눈 뒤 술자리가 벌어지자 대구 출신 민족시인 이상화의 시비를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즉석에서 뜻이 하나로 모아져, 곧바로 역할을 분담하였다. 1948년 달성공원에 시비를 세우게 되었고, 시비에 써넣은 「나의 침실로」의 한 구절은 당시 열한 살이던 이상화의 셋째아들 이태희가 썼다.

창간호에는 이윤수를 비롯하여 유치환·오란숙·박목월·이호우·김동사 같은 17명의 동인들이 시를 발표하였다. 어려움을 극복하며 시 동인지가 계속 발간되자 작품을 발표하는 동인이 전국 규모로 늘어나 60여 명의 시인들이 235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가운데는 김달진·박두진·조지훈·김상옥·윤곤강·이상로·조연현·구상·조영암·서정태·설창수·이경순·조향·김춘수·이정호·신동집·박화목 같은 작가와 추천을 통해 김요섭·윤운강·최계락·천상병·이명자 같은 신인들이 문단에 나왔다. 그리하여 『죽순』은 해방된 대한민국 문단의 시 전문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으며 그 중심에 대구가 있었다. 그러나 죽순문학회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하여 중간에 휴간이라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중앙 문단과 달리 지방에 있는 문학단체라는 이유로 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창간호부터 제10집까지를 묶어서 『죽순 영인본』을 발간하였고 ‘상화시인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수상자를 배출하였다. 대구광역시 중구 향촌동에 있는 대구문학관 3층에 올라가면 안내데스크 앞에 커다란 탑이 하나 있는데, 바로 대구 문학의 상징인 ‘죽순탑’이다.

『죽순』은 해방 이후 최초의 시 전문 동인지로 1946년 5월 창간, 1949년 7월까지 11집과 임시증간호를 포함하여 12권을 발간하였다. 지역에서 발행된 시 전문 동인지라는 점에서 대구문학관에서는 문학아카이브 업무 시 우선적으로 수집하여야 하는 자료였다. 그러나 발행 부수가 적기도 하였거니와 보존 자체가 어려운 재질인 갱지(更紙)류로 발행되어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파손, 소실된 상태였다. 간신히 창간호만 수집하였다가 대구문학관 개관 후 지역 고서적 업체의 경매를 통해서 임시증간호를 포함한 전체 12권을 오롯이 아카이빙할 수 있었다.

『죽순』이윤수의 주재 하에 죽순시인구락부의 동인 모임 활동 일환으로 발간되었다. 『죽순』의 창간 동인으로는 김동사, 박목월, 유치환, 이영도, 이호우, 최해룡, 이응창 등이 있었으며, 회차가 진행될수록 구상, 김춘수, 신동집, 이설주, 박양균 등 지역의 문인들이 참여하였다. 김요섭과 천상병은 『죽순』을 통하여 원고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창간호의 편집후기에서 “죽순처럼 힘차게 항상 푸른 대처럼 절개롭게 굳은 마음으로 똑바르게, 이 고장 시문학의 봉화가 되겠다!”고 눈 덮인 대지를 뚫고 솟아오르는 죽순의 의지를 반영한 것처럼 ‘죽순’의 염원은 꺾이지 않아 30년이 지난 1979년 대구의 문인들과 전국 필진의 참여로 복간되기에 이르렀고, 현재까지 그 의지를 담아 왕대의 숲을 이루며 한 세기 가까이 우리 시대의 문학을 현재 진행형으로 아카이빙하고 있다.

대구문학관은 ‘죽순, 그 열두 마디의 외침’이라는 기획전시를 통하여 창간 70주년을 맞이한 『죽순』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1948년 발행된 『죽순』 제8집에는 달성공원에 있는 국내 최초의 시비 ‘상화시비’가 건립되는 과정과 사진 자료가 실렸다. 시비에 새겨진 「나의 침실로」도 함께 전시되어 민족시인 이상화를 되새겨 볼 수 있다.

[이상화의 도시 대구]

대구를 대표하는 근대 시인으로 이상화이육사, 이장희, 박목월, 조지훈, 이호우, 김춘수를 빼놓을 수 없다. 그중 이상화는 마흔둘이라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조국의 말과 글로써 식민지 시대를 밝힌 지조 있는 민족시인이다. 대구 중구 서문로에서 1901년 4월 5일 태어난 이상화는 큰아버지인 이일우(李一雨)가 세운 학숙인 우현서루(友弦書樓)에서 한문교육을 받았다. 그 뒤 경성중앙학교 진학을 위하여 서울로 갔으나 학업에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3년을 수료하자 곧장 대구로 돌아오고 말았다.

1919년 3·1운동 당시 이상화는 대구에 있었다. 종교계와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거사 모의를 하던 중 시위 전날 주요 인물의 예비 검속으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상화는 서울에 있던 박태원의 하숙으로 피신, 화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의 시위는 3월 8일 강행되었고 많은 인원이 검거 투옥되었다. 프랑스 유학을 꿈꾸던 이상화는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 들어갔다. 그러나 1923년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인들이 거리에 있던 한국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이상화는 모든 것을 단념한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이상화는 잠시 대구에 머물다가 서울로 올라가 작품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러다가 1926년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함으로써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28년 6월 이상화신간회 대구지회 간사 자리에 있었던 터라 동지들과 함께 구금 송치되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조선의 흙을 사랑하였고, 말과 글을 사랑하였으며, 고향인 대구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이상화교남학교 교사 재직 당시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는 신념에서 운동 경기 종목에 권투를 포함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이상화가 작사한 교가로 인하여 가택수색을 당하였고, 그 바람에 이상화의 원고는 물론 이장희의 유고마저 압수당하고 말았다.

당시 교남학교, 현재의 대륜중학교 교가는 다음과 같다.

태백산이 높솟고

낙동강 내달은 곳에

오는 세기 앞잡이들

손에 손을 잡았다

높은 내 이상 굳은 너의 의지로

나가자 가자 아아 나가자

예서 얻은 빛으로

삼천리 골골에 샛별이 되어라

이상화는 1918년에 쓴 첫 작품 「나의 침실로」가 『백조』에 발표된 뒤 본격적으로 활동하다가 1930년 이후에는 중단함으로써 10년 남짓 되는 기간만 창작 활동을 하였다. 이상화가 일생동안 남긴 작품은 시 60여 편, 소설 2편, 산문 20여 편, 번역소설 5편 정도다. 특히 시·산문·비평을 합하여 전체 작품 가운데 절반 이상을 1925년과 1926년에 발표하였다.

이상화는 평생에 걸쳐 다섯 가지를 추구하였는데 ‘진리를 찾자. 올바르게 살자. 민족을 구하자. 세계를 만들자. 인류에게 이바지하자.’라는 신념이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고, 1998년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으며, 2008년 이상화가 살았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 고택이 복원되었다. 또한 달성공원에 시비, 두류공원에 동상, 수성못 가에 시비, 그리고 달성 화원에 위치한 가족묘역에 시비가 세워졌다.

[이성복의 대구]

2005년 계간 『시인세계』가 시인 156명에게 현대시 100년사에 큰 영향을 끼친 시집을 물었다. 백석 『사슴』, 김수영 『거대한 뿌리』, 정지용 『정지용 시집』, 서정주 『화사집』, 이성복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가 거론되었다. 다른 넷은 작고한 전설이 되었고 이성복 시인만 현역인 채로 호명되었다. 시인 이성복은 경상북도 상주시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서울에서 보냈으나 직장생활부터 대구 사람이 되었다. 1981년 취직한 아내를 따라 대구에 내려왔는데, 1982년부터 계명대학교 교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18년, 그리고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12년 재직하고 2012년 명예퇴직을 하였다. 30년 넘게 일하다가 퇴직한 이성복에게 대구는 시를 쓴 곳이자 가르친 곳이자 배운 곳이 되었다.

이성복은 서울대 불문과 재학 시절 만난 스승 김현의 기대와 후원으로 1977년 『문학과 지성』에 「정든 유곽에서」를 발표하며 문단에 등장하였다. 1980년에 나온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대한 평을 살펴보면, 당시 문단은 파격적이고 과감하며 일견 현란하면서 신선하기까지 한 신인의 시를 당혹함과 경탄으로 맞아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1980년대 이후 한때 우리 시단에 신드롬을 몰고왔던 이성복의 시는 1999년 한국문학 특집호로 꾸며진 프랑스 권위의 시 전문지 『포에지』 여름호에 소개되었다. 이상, 김춘수, 기형도 등 11명의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들과 함께 이성복의 대표 시 10여 편이 실려 프랑스 문학인에게 주목을 받았다.

이성복은 빈 종이를 보면 채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는 1978~1979년에 가장 긴장된 시를 썼다. 산문집 『고백의 형식들-사람은 시 없이 살 수 있는가』에는 이성복과 시의 관계를 잘 보여 주는 글이 나와 있다. “이십여 년 전 나의 마음속엔 불덩어리 같은 의문 하나가 꺼질 줄을 몰랐다. ‘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시 없이 한순간이라도 살 수 있는가.’ 이를테면 시는 입이었고, 밥이었고, 밥 위로 흐르는 침이었다. 밤마다 나는 시와 함께 잠들었고 시와 함께 깨었다. 고로쇠나무 수액을 받는 사람들처럼 나는 몸 속에 흘러내리는 시를 받아 적기 위해 메모지와 펜을 옆에 끼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 시절 나는 ‘시는 나의 유일한 구원’이라고 말했다가 여러 번 핀잔과 비웃음을 샀지만, 그럴수록 시에 대한 나의 믿음은 깊어 갔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시를 신비화하거나 이상화했던 것은 아니다. 시에 대한 나의 사랑은 삶에 대한 사랑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한 편의 시는 사랑의 눈으로 들여다본 막막하고 안쓰러운 세상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때 나는 예술지상주의자였으며 동시에 예술지상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동안 나는 시로부터 멀리 떠나와 살게 되었다. 그토록 젊고 아름다웠던 ‘시’라는 애인은 이제 막 흰머리가 돋아나기 시작하는 중년 여인이 되었다. 이제 나는 시의 흰 머리카락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의 발문을 쓴 황동규 시인은 “그의 시를 읽고 당황한 사람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지난 십여 년간 우리가 길들여져 있는 몇 가지 유형의 시 어느 것에도 맞지 않은 것이다. 표면적으로 그는 김수영과 비슷하면서 그에게서 볼 수 있는 사변적인 요소를 극도로 줄이고 있다.”라고 평한다. 한편 이윤학 시인은 “보들레르는 나를 인생의 병원에 입원시켜 주었고 나는 거기서 이성복이라는 의사를 만났다. 이 시집을 백 번쯤 읽었을 때 그동안 읽었던 시들은 맛이 없어서 다시는 찾지 않은 식당으로 변했다. 그의 시집들은 내가 빠져든 종교의 경전이었다. 그의 첫 시집은 나를 그 종교에 빠지게 만든 입문서 같은 것이었다.”라고 감탄한다.

시란 언뜻언뜻 보이는 삶의 맨살들이라고 정의하는 이성복은 대구에 정착하며 살아간 것 또한 시적으로 비유한다. “내가 대구에 뿌리내린 것은 원래 부산에 가려고 했다가 전주나 정읍쯤 와서 멈춰버린 것과 같다. 이미 지나가 버린 기차를 역에서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다. 바꿔 말하면 내 문학적 삶과 실제의 삶이 기형도 시인의 경우처럼 딱 들어맞지 못한 데에서 오는 쑥스러움이 늘 자리 잡고 있다.”

첫 시집 이후 『남해 금산』, 『그 여름의 끝』,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아, 입이 없는 것들』, 『래여애반다라』 등을 펴내고도 이성복은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보상받을 수 있도록 “한 편의 제대로 된 시를 썼으면 좋겠다.”라고 수줍게 고백하는 시인이다.

[장정일과 대구]

기형도의 산문집에 실린 「짧은 여행의 기록」을 보면 1988년 여름에 대구를 찾은 이야기가 나온다. 기형도는 대구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대구는 나에게 대통령을 뽑은 무서운 도시, 시인들만 우글거리는 신비한 도시, 그리고 폭염의 도시로 달려들었다. 이성복, 이하석, 이태수, 장정일, 구광본, 그리고 김춘수, 한때의 이문열, 그리고 작가 석경 고향도 그곳이었다.”

그 대구 방문에서 기형도는 장정일 시인을 만난다. 기형도는 ‘장정일 소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장정일은 책은 지문 묻을까봐 손을 씻은 뒤 읽으며, 초판만 읽지 재판은 읽지 않으며, 책에는 볼펜 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한 번 본 시들은 모두 외우다시피 한다고 내게 이야기했다.”

기형도와 장정일은 ‘시운동’이라는 동인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시운동은 하재봉, 남진우, 박덕규, 안재찬[류시화], 이문재 등 당시 젊은 시인들이 활동하였던 1980년대 대표적인 시동인이다.

장정일은 1962년 대구 달성에서 태어나 성서중학교를 다녔다. 19세 때 폭력 사건에 말려들어 대구교도소 미결수용동을 거쳐 소년원으로 보내져 1년 6개월 간 소년원에 있을 적에 다양한 책들을 읽었다. 1982년 시인 박기영을 만나 시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84년 무크 『언어의 세계』 3집에 「강정간다」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5년에는 박기영과 2인 공동 시집 「성(聖), 아침」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한편 박기영은 대구 달성고를 중퇴한 뒤 중국집 배달 일을 시작으로 숱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문학을 독학한 시인이다. 1979년 열일곱살 장정일을 처음 만나 문학의 길로 이끌었다. 박기영은 장정일의 두 번째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1988] 맨 앞에 실린 시 「삼중당 문고」 중 “박기영 형과 2인 시집을 내고 읽은 삼중당 문고”라는 구절에도 등장한다. 박기영은 1982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였으며, 장정일과 함께 시운동 동인으로도 활동하였고, 1991년 첫 시집 『숨은 사내』를 민음사에서 냈다.

장정일은 장르에 관계 없이 글을 써냈고 인정을 받았다.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실내극」이 당선되었으며, 첫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8]으로 제7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또한 시집 『상복을 입은 시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88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 소설 「펠리컨」을 발표하였으며,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잡기』를 간행하였다. 이후 시집 『서울에서 보낸 3주일』, 『통일 주의』를 간행하였으며 소설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도 펴냈다.

대구에서 활동한 김춘수의 시 「꽃」을 패러디한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역시 널리 알려진 장정일의 시 작품이다. 시인으로서 장정일은 유하와 더불어 소비 자본 사회화가 되어 가는 1980~1990년대 대한민국 사회를 대중문화와 엮어 풍자적으로 드러낸 작품으로 유명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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