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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70
한자 大韓民國 敎育首都, 大邱
분야 문화·교육/교육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주연

[정의]

대구광역시가 자랑하는 교육도시로서의 명성과 대구교육박물관.

[개설]

2015년 10월, 대구광역시교육청은 ‘대한민국 교육수도 대구’를 선포하고, 학생의 행복을 학교 교육의 중심가치로 삼겠다고 선언하였다. 대구광역시가 침체기를 벗어나 교육도시로서의 명성을 회복하면서 우리나라 교육을 선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표현되는 계기였다.

[대구 교육의 역사]

예로부터 대구는 인재가 넘치는 교육도시였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을 기반으로 한 정신문화의 요람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학생들의 구국 정신이 빛났으며 독재정권 시기에는 정의감이 살아 있는 도시였다.

대구광역시에는 조선 태조가 조선 건국과 더불어 1938년 세운 교육기관인 향교가 존재한다. 조선시대에 경상감영은 향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과 문화에 주력하였다.

처음 향교가 세워진 장소는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교동 자리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이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자리에 이건되었다. 여느 항교처럼 공자의 가르침이 깃든 배움터이면서 『명심보감』과 『소학』을 가르치는 전통교육 프로그램이 진행되던 곳이었다. 현재는 단아한 분위기 덕분에 조용히 거니는 시민들과 전통혼례식을 올리는 풍경을 종종 목격할 수 있다.

경상감영은 지역의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기 위하여 향교를 중심으로 한 교육·문화 시책을 펼쳤다. 특히 책을 통한 교육에 힘썼는데 출판문화와 도서관적인 기능을 중시하였다. 경상감영이 발간한 간행물은 200종에 이르며, 이는 대구가 학문적 토대를 갖추는 데에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경상감영은 1721년(경종 1) 인재 육성을 위한 ‘낙육재’라는 교육기관을 운영하였는데, 낙육재는 조선시대 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여 독서와 학술연구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대구시립중앙도서관의 고문헌실 명칭을 ‘낙육재’로 부르는 것의 연원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이다.

1896년에는 정부가 세운 최초의 근대 학교인 대구부 공립소학교가 설립되었다. ‘대구부 공립소학교’라는 이름은 10년간 이어지다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이후 대구에는 선교사들에 의한 사립학교와 지역민들이 힘을 모아 설립한 학교들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899년 4월에는 대한제국이 제정 공포한 중학교 관제에 따라 근대식 교육기관인 사립 달성학교가 세워졌다. 대구 최초 근대학교인 달성학교는 경상감영 북문 안의 무너진 관아터에서 개교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도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통감부가 간섭하면서 1905년 대구공립소학교[현 대구초등학교]로 인계되고, 고등과는 1909년에 개교한 협성학교로 흡수되었다.

1989년 10월 프랑스인 선교사 로베르 신부는 계산성당 교육관 내 대구 최초의 사립 교육기관인 해성재(海星齋)를 설립하였다. 지금까지도 해성재는 효성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1900년, 미국 선교사 아담스가 당시 제일교회의 대문채를 교실로 삼아 대남소학교를 개교하였다. 아담스의 동료 선교사였던 브루엔의 부인 마르타 브루엔도 같은 교회 안의 여학생들을 위한 신명소학교를 설립하였다. 두 학교는 1926년 합병되어 오늘날의 종로초등학교로 이어졌다. 아담스는 1906년 선교사 사택에다 청소년을 위한 학교를 세운 뒤 1908년 대구 중구 대신동으로 이전하여 계성학교를 건립하였다. 영남 지방 최초의 2층 양옥 건물 아담스관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담스관은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교육도시로서의 상징은 도립대구사범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대구도시철도 2호선 경북대학교병원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대구사범학교가 있던 자리인 대구광역시 중구 달구벌대로 2178[대봉동 60-18]에 도착할 수 있는데 현재는 경북대학교사범대학부설중고등학교가 그 자리에 있다. 1925년 지은 대구사범학교 강당이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원형이 잘 유지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이던 1923년 4월 1일 초등교사 양성을 위하여 설치한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가 폐지되고 1929년 6월 1일 관립 대구사범학교로 신설되었다. 졸업 후 몇 년 동안 의무적으로 교사생활을 하는 조건으로 수업료를 면제받았기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던 수재들이 앞다투어 입학하였다. 1946년 10월 15일 대구사범대학으로 승격한 이후 1950년 10월 6일에는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으로 개편되었다.

[교육수도 대구]

대구광역시 곳곳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상징 문장이 있다. ‘대한민국 교육수도 대구’가 그것이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태극 문양을 이룬 배경 위에 힘찬 글씨체로 쓰인 이 문장은 대구광역시의 일선학교 담벼락에서도, 대구광역시에서 운행하는 대중교통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브랜드가 되었다. 대구광역시가 지닌 교육도시로서의 자부심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시도교육청 평가를 지표로 놓고 보았을 때 대구광역시교육청의 순위가 하위권을 맴도는 일들이 몇 해 이어지자 위기의식이 대두되었다. 한때 어느 고등학교가 서울대학교를 몇 명 보냈는지로 그 해의 학력 수준을 가늠하던 때와는 세상이 판이하게 달라졌음을 실감케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급기야 2010년 시도교육청 평가에서 밑바닥을 친 대구광역시교육청은 우선 교육비리 척결에 나섰다. 청렴도 평가 2년 연속 최하위, 기관평가 2년 연속 꼴찌, ‘수성구‘와 ‘비수성구’ 학력 격차 심화 등 뼈아픈 지적들이 뒤따랐지만, 그중에서도 청렴도만큼은 교육기관으로서 가장 먼저 해결하여야 할 과제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교사와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간에 무너진 신뢰 회복이 최우선이라고 보고 깨끗한 교육 풍토 조성부터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강력한 반부패·청렴 인프라를 구축한 대구광역시교육청은 정책 투명성과 신뢰성 제고를 통해 부패 유발 요인을 미리 제거하고 공직사회 의식을 개선하는 분야를 집중 육성하였다. 효과는 연쇄적으로 나타났다. 청렴도가 개선되니 각종 교육지표 또한 동반 상승한 것이다.

그런데 한 고비 넘겼다고 여긴 대구광역시교육청이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기도 전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2011년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중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은 대구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 학교에 파장을 낳았다. 교육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하여 학생이 행복한 학교에 대한 담론이 이어졌다. 이른바 행복 역량 교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때까지 대구광역시 교육청의 교육 비전은 ‘꿈과 행복을 주는 일류 대구 교육’이었는데, ‘꿈·희망·행복을 가꾸는 대구 교육’으로 바뀌게 된다. 그동안 일등이 되기 위하여 과다한 경쟁을 유발한 ‘일류’라는 단어를 과감히 뺀 것이다. 이제 학교는 더 이상 지식 전달 기관이 아니라 학생의 인성을 중시하는 행복 교육 기관이라는 데 공감대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대구광역시의 일선 학교에서 시험, 성적이라는 단어보다 꿈과 끼라는 단어가 더 자주 언급된 것도 이때부터다. 학교폭력피해 응답률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전국 최저 수준으로 낮아지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16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조사한 한국 청소년 삶의 질 조사에서 전국 1위, 서울대학교와 세이브더칠드런이 발표한 한국 아동 삶의 질 연구결과에서 8개 영역 모두 대구가 1위를 차지한 것은 그저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학업중단률, 정서행동 특성검사 관심군 비율, 인터넷과 스마트폰 과다 사용자 비율, 학교폭력 피해 응답률, 저체력 학생 비율이 모두 전국 최저 수준으로 낮아졌다. 또한 학업성취도, 특성화고 취업률 등은 전국 최고 수준으로 높아졌다. 요컨대 대구 학생들이 전국에서 가장 선량하고 튼튼하며 우수한 학력과 실력을 갖게 된 것이다. 대구광역시교육청의 정책은 금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협력학습 중심의 교실수업개선, 한 명의 아이도 소외되지 않는 대안교육, 예술교육과 스포츠활동을 통한 정서 함양과 관계회복교육, 인문소양교육을 통한 인성교육, 가정교육의 기능을 회복시키는 학부모교육 등은 타시도 교육청에서 벤치마킹할 만한 주제였다.

[지방도시에서 교육수도가 되기까지 1. 교실에서 시작된 변화]

교육의 변화는 교실에서 시작되어 교실에서 끝난다고 봤을 때 이제는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는 인식이 대구광역시의 교사들을 중심으로 점차 확산되어갔다. 학생들이 모둠별로 토론하며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수업, 거꾸로 교실, 유대인 교육법인 하브루타 등 생소한 용어들이 대구 교육계를 휘감더니 어느새 교사와 학생의 협력학습으로 초점이 모아졌다. 교실에서의 작은 혁명을 경험한 대구광역시교육청은 교육부보다 한 해 앞서 선제적으로 중학교 자유학기제를 시행하였다.

성적순으로 줄을 세울 때에는 움츠러들었던 말인 융합과 창의라는 단어가 다시 날개를 달기 시작하였다. 대구광역시교육청은 해마다 창의력경진대회를 여는데 2002년부터 초등부, 2008년부터 중등부 대회를 시작하여 꾸준히 성과를 내고 있다. 교육부,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서울시를 비롯한 13개 시도교육청의 후원을 받는 대회로 격상된 창의력경진대회는 두 명이 한 팀을 이루어 참가하는 형식이라 팀워크가필수다. 또한 많은 문제를 빨리 풀어야 하였던 기존의 시험과 달리 하나의 문제를 오랫동안 깊이 있게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혼자만 잘 풀면 되던 그간의 시험과 다르게 친구의 의견을 경청하고, 자신의 생각을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는 능력을 키워 문제 상황을 다양한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AI와 더불어 살아야 하는 미래 세대는 지식 위주의 교육보다도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이해와 전문성이 더욱 필요하다. 창의력경진대회는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소통하며 협업하는 과정에서 인문학적 사고와 감수성까지 얻을 수 있는 시도로 평가받고 있다.

[지방도시에서 교육수도가 되기까지 2. 행복도 역량이다]

조선시대 경상감영에서 낙육재를 설치하고 운영한 것과 같이 대구광역시교육청이 21세기에 찾은 교육의 핵심은 다시, 책이었다. 인문도서 100권 읽고, 100번 토론하며, 1권 쓰기라는 주제로 이른바 100-100-1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대구광역시교육청에서는 해마다 ‘인문고전 100선’을 선정하여 발표하고 있으며 아침 독서 시간, 국어교과 연계, 도서관 활용 수업 등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있다.

유가의 가르침인 수기안인(修己安人)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바른 인성’을 지니고 ‘더불어 살아 가는 능력을 함양’한다는 것이 대구광역시교육청 인성교육의 핵심이다. 이를 위하여 교사, 학생, 학부모의 교육 3주체에 지역사회를 결합함으로써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하여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슬로건을 적용하였다. 가령 학교 수업의 결과물을 전시하여 주민과 공유한다거나 유관기관과 협력한 학교 교육의 성과를 다시 지역사회에 퍼트리는 활동들이 줄을 이었다. 소통하고 배려하며 봉사하는 덕목을 중심으로 더불어 사는 능력 함양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대구광역시교육청의 ‘인성교육 실천 3운동’은 미소 친절 운동[소통], 먼저 양보 운동[배려], 사랑 나눔 운동[봉사]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하여 가장 기본이 되면서도 따뜻한 삶을 공유할 수 있는 인성교육의 시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대구광역시교육청은 이밖에도 대구행복교육뉴스, 아름다운 선생님 발굴, 사랑의 도시락데이 등의 활동을 통하여 실천 중심의 인성교육이 이루어지도록 앞장섰다.

[대구교육박물관이 입증하는 교육도시 대구]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대구교육박물관은 수준 높은 교육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도 대구의 숨은 교육사 이야기를 전시유물로 안내하여 호평을 받고 있다. 영남권 최초의 교육박물관인 대구교육박물관은 옛 대구대동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하여 건립하였다. 2만여 점의 교육 관련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교육역사관에는 대구 중심으로 교육사를 정리하였다.

대구교육박물관에서 출판한 자료 중 1930년대 대구의 한 여학생이 쓴 일기를 번역한 『여학생 일기』라는 책이 있다. 1937년 2월부터 12월까지 약 11개월간 일기를 쓴 여학생은 현재 경북여자고등학교가 된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의 10기생으로 이름은 알 수 없다. 한 여학생의 일기를 통하여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사회상과 학교생활을 엿볼 수 있는 교육적 자료라 할 만하다.

또한 조선시대 대구의 학생들인 유림들이 공부한 기록이나 대구 출신 과거 시험 합격자의 답안지, 대구의 학생들이 만든 책이나 물건 등은 지역적 정서가 반영되어 대구 지역의 학생들이 친근하게 다가갈 만한 유물들이다.

먼저 선조부터 광해군 때까지 대구의 연경서원 등에서 공부한 유림의 명단, 교육과목, 평가, 출결사항 등을 기록한 책인 『통강록』 복제본이 그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조선 현종 때 조시원이 문과에 응시해 제출한 과거시험 답안지인 「조시원 시권」이다. 세 번째는 『국민소학독본』인데 1895년에 발행된 근대식 국정 교과서로 총 41과로 구성되어 있다. 네 번째는 『만선수학여행 안내』로서 1932년 당시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의 수학여행 안내 책자이다. 다섯 번째로는 일제강점기 후반 대구사범학교 문예부 학생들이 발간한 문집인 『반딧불』 복제본이다. 여섯 번째는 1937년 대구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 11개월 동안 쓴 여학생 일기이다. 일곱 번째는 피난학교 전시물인데 전시용 임시 교재, 무상원조 공책, 양철 필통, 취학통지서, 졸업증서 등 6·25전쟁 당시 사용된 각종 자료 일체가 전시되어 있다. 여덟 번째는 ‘2·28민주운동 전시물’로서 1960년 2·28민주운동 당시 신문 기사, 결의문 등 관련 전시 자료 일체가 포함되어 있다. 마지막 아홉 번째는 현대 학생 생활 전시물로서 1960년대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시기 동안 사용된 교복, 교구 등 학교 관련 전시 자료 일체가 전시되어 있다.

이처럼 대구교육박물관은 관람하는 것만으로 학습이 일어날 수 있도록 정교히 구성되어 있으며 대구교육박물관에서 주목해야 할 9개의 유물은 다양성과 중요성 면에서 다시 방문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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