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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43
한자 大邱- 市場, 商業都市- 代名詞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대구의 특색을 상업 도시로 각인되게 한 대구의 시장.

[개설]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시장이 생겨나고, 시장을 배경으로 객주가 등장하였다. 더욱이 대구는 경상감영이 설치된 경상도의 수부였고, 낙동강 물길을 배경으로 바닷가의 해산물과 내륙의 곡물을 교환하는 방식의 어염미두(魚鹽米豆) 무역의 주요 지점이었다. 조선 후기 대구에는 10여 개소의 시장이 열렸으며, 지금도 그 명맥을 엿볼 수 있다. 대구의 시장은 시민 경제활동의 장일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어서 독립운동의 명소로도 이용되었다.

[대구 시장의 맏형, 서문시장]

조선 후기 대구의 시장 가운데 읍장(邑長)은 서문[밖]시장이다. 서문 밖에 형성된 시장이라는 뜻과 대구 시장의 맏형이라는 의미도 포괄하였다. 구역은 오늘날 동산동, 시장북로, 서문로1·2가, 대신동, 계산동1가, 인교동을 포괄하며, 면적은 약 5,000평[약 16,529㎡]이었다. 거래 품목은 농수산물을 비롯하여 말과 소의 가축, 땔감 등 상품이 될 만한 다양한 생산물을 포괄하였다. 서문시장은 우시장, 마전, 홍두깨전, 싸전 등과 같은 10여 개의 전문 시장으로 구성되었다.

서문시장은 2일과 7일에 열리는 5일장으로 대구 인근에서 3일과 8일에 열렸던 화원장과 백안장, 4일과 9일에 열렸던 범어장과 오동원장 그리고 풍각장, 5일과 10일에 열렸던 해안장과 현내장 등과 시장망을 이루며, 각 시장의 물류의 집하와 배분 기능을 하는 대시(大市)였다. 그렇기에 서문시장은 ‘대구읍장’, ‘대구큰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장이 서는 날이면 시장에는 장을 보러 나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사람들이 입은 흰옷으로 거대한 백의의 물결을 이루었다.

서문시장은 1914년 부령 제136호의 시장 규칙이 발포됨에 따라 대구부로 운영권이 넘어갔다. 시장세, 시장의 위생 시설, 상품 진열 구역의 지정을 포함한 모든 부문의 관리를 대구부가 관장하게 되었다. 서문시장은 1922년 내지 1923년에 대구부천왕당지(天王堂池)를 메운 자리로 이전 개축하였다. 천왕당은 원래 계몽운동기에 세워진 사립 명신여학교의 소유였으나 조선인에게 매매한 뒤 동양척식주식회사 대구지점에 다시 팔렸다. 대구부동양척식주식회사 대구지점의 소유인 천왕당못을 소유하게 되면서 서문시장을 이전할 수 있었다. 이전한 서문시장은 부지 1만 평에 건평 5,000평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시장은 5개 구역으로 구분되었고, 10m 폭의 도로로 연결되었다. 서문시장의 거래 규모는 1923년에 210만 7000원, 1934년 215만 원으로 평균 200만 원을 넘어섰다. 서문시장은 대구의 섬유산업이 성장하는 가운데 포목과 한복으로 하는 혼수 문화에 힘입어 포목점이 크게 번성하였다.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이어 호남고속도로가 뚫리는 등 전국의 유통 체계에 큰 변화가 생기면서 서문시장의 위세는 서울과 부산에 밀려 갑자기 기울어졌다. 게다가 1972년 제4지구에서, 1973년 제3지구에서 잇달아 난 큰불은 서문시장을 전국을 움직이는 도매시장에서 지방의 큰 시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서문시장의 포목점은 오랫동안 ‘자영업자의 로망’일 정도로 부의 상징이었으나 1970년대 산업화를 겪으며 혼례 때의 ‘혼수 문화’가 포목이나 한복에서 전이나 보석으로 빠르게 변하면서 포목점의 거래량이 줄어들었다. 그 뒤 서문시장은 수차례의 현대화에도 불구하고 영세상인의 난립과 경쟁 시장의 등장, 대형마트와 소매점의 증가로 인하여 원도매 기능을 서울의 시장 상인에게 넘겨주고 중도매나 소매 기능 위주로 상권이 점차 줄어들었다.

[대구의 2대 시장, 동문시장]

조선 후기 대구에는 ‘서시(西市)’와 ‘동시(東市)’라는 2개의 큰 시장이 있었다. ‘동시’는 동문시장의 줄임말로 4일과 9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 따르면, 서문시장을 ‘읍시(邑市)’라 하고, 동문시장을 ‘신시(新市)’라 불렀다. 대구의 새 시장으로 불리던 동시는 1791년(정조 15)에 동문 방면으로 이설되었다. 또는 『대구부읍지』에 따르면 대구의 신장은 1911년 동문 방면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대구의 신장 또는 동시가 남문 방면에서 동문 방면으로 옮겨 간 것을 사실이다. 그러다 일제가 병영 도로를 확장하면서 동문시장은 1917년 8월과 1919년 7월 두 번에 걸쳐 덕산동으로 옮기게 되었다.

덕산동에 자리 잡은 동문시장은 1929년부터 대구부의 정책에 따라 이전 개축이 추진되었다. 그 이유는 동문시장의 크기가 2,000평[약 6,612㎡] 정도에 지나지 않아 시장 상인이 도로에까지 나와 장사를 하여 도로가 시장이 되어 버린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 개축에 필요한 예산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동문시장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1932년 10월 대구부는 일본 대장성 예금부에서 저리 자금 65,000원을 빌려 남산동에 2만 2750평[약 7만 5207㎡m]의 토지를 사들여 이전할 계획이라고 발표하였다. 또 덕산동에서 남산동까지 폭 20m의 도로를 개설할 계획도 함께 발표하였다. 이 도로는 중앙통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만약 이 도로가 개설되면 대구역에서 중앙통을 거쳐 남산동 동문시장까지 곧장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계획 또한 제때 실행되지 못하였다.

1937년 4월에 남산동 일대 2만 3195평[약 7만 6678㎡] 규모에 동문시장이 이전 개축하게 되었다. 이전 규모의 10배 이상의 크기였다. 대구부와 부회는 남산동으로 이전한 동문시장의 이름을 ‘남문시장’으로 변경하였다. 이로부터 오늘날의 남문시장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덕산정 동문시장의 상인들 모두가 옮겨 온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대구부동문시장 이전 개축 계획이 발표되던 1929년에 염매시장이 개설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나무꾼의 시장, 신탄시장]

신탄시장은 장작과 숯 같은 땔감을 거래하는 연료 시장이었다. 대구의 신탄시장은 월견산 밑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월견산시장’으로도 불렸다. 월견산은 제일여자중학교[현 대구제일중학교] 뒤편에 있으며, ‘달맞이산’, ‘오포산’, ‘연구산’과 같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신탄시장은 연료 시장이니만큼 추위가 몰려오는 겨울철이 성수기였다.

신탄시장에 땔감을 팔러 오는 사람 중에는 가창골과 팔공산의 농민들이 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고율의 소작료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춥고 긴 겨울철에 생활에 보탤 요량으로 소나무 가지를 꺾어다 대구의 신탄시장에 내다 팔았다. 소나무 가지 한 묶음을 1원에 사서 신탄시장에서 1원 60전 내지 1원 70전에 팔 수 있었다. 물론 추운 겨울날 소나무 가지를 지게에 지고 가창에서 걸어서 월견산 신탄시장까지 오고 가는 수고를 해야 하였다. 그 송지를 사는 사람들은 비싼 석탄 연료를 살 수 없는 민중들이었다. 신탄시장 그야말로 민중들의 고된 삶과 애환이 묻어나는 처절한 삶의 현장이었다.

[소비자를 위하여 싸게 파는 염매시장]

염매시장(廉賣市場)은 대구 시민들에게 많이 알려지고 익숙한 시장이기는 하나 그 시작과 운영에 대하여서는 오히려 낯설다. 잘 알고 있듯 ‘염매(廉買)’의 사전적 의미는 물건을 싼값에 판다는 뜻이다. 식민지 시대에 염매는 익숙한 상거래 용어였으며, 요즘으로 치자면 ‘세일’이라는 것으로 통할 듯하다. 그런데 식민지 시대 대구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염매시장은 여러 개소가 있었으나 조선인이 운영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1929년에 들어 대구 유지들이 조합 형태의 염매시장을 설치하게 되었다. 조합원은 조선 사람들로만 해서 100명으로 구성하고, 자금은 1만 원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위치는 덕산정 동문시장 근처의 300평[약 992㎡] 정도를 매입하고, 공사비 9,000원을 들여 23개소의 상품 진열소를 만들어 1929년 10월 15일에 개업하였다.

염매시장 개업 때 조합 임원을 보면, 조합장에 배영덕(裵永悳), 부조합장에 백낙희(白樂熙), 이사 이응복(李應福), 송기식(宋箕識), 정운일(鄭雲馹), 임상조(林尙祚), 강치운(姜致雲), 이내문(李乃文), 백남채(白南採) 등이었다. 그런데 염매시장은 여느 시장과 달리 2층 구조였다. 그러기에 1929년 12월에 종로 상인들이 염매시장 2층을 빌려 ‘종로번영회 창립총회’를 열 수 있었다.

염매시장은 언제부터인가 ‘덕산시장’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1978년 대구시는 덕산시장을 현대화하기 위하여 80억 원을 들여 18층 상가아파트로 탈바꿈시킬 덕산지구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때 덕산시장은 속칭 ‘염매시장’으로 곁들여 썼다. 대구시에 따르면 지하 3층, 지상 15층, 연건평 1만 7600㎡의 현대식 건물로 짓되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까지는 상가로, 지상 4층부터 15층까지는 아파트로 조성할 계획이었다. 아파트는 철거 상인과 무주택자에게 분양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염매시장을 현대화하는 덕산지구재개발 사업은 추진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긴 역사를 가진 시장, 약령시]

대구의 남성로에 300m의 길에 한약방, 한의원, 한약상, 한의약박물관이 있는데, ‘약전골목’이라 부른다. 대구 약령시의 시작에는 여러 이야기가 있으나 대체로 1640년부터 1658년에 걸치는 시기이며, 효종이 왕위에 있을 때이다. 약령시는 국가의 명령으로 열리는 약재 시장이라는 뜻이다. 대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시장이다. 약령시는 시장이 열리면 정부에서 가장 먼저 약재를 사들인 다음 전국에서 몰려든 상인, 의생, 일반 수요자들이 거래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약령시는 달성관이라 불리는 경상감영의 객사 자리에서 열렸다. 1904년 발행된 『한국실업지침』에 따르면, 장이 열릴 때면 전국 13도에서 모여든 구매상이 1만 명, 고객 거래고는 70만 원 내지 100만 원을 웃돌았다고 한다. 그런데 1908년 친일 관료인 경북 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이 대구 부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객사를 강제적으로 허문 뒤, 약령시는 정책에 따라 남쪽 성벽 자리인 지금의 남성로로 옮겨 오게 되었다.

약령시 상인들은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하여 1909년 약상입규흥업회, 1910년 대구약상흥업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이때만 해도 중국, 일본, 몽고 등 아시아 지역의 거상들이 한약을 사기 위하여 약령시에 몰려들었다. 또 1923년에는 약령시진흥동맹회를 만들어 대대적 부흥 운동을 펼쳤다. 약령시에는 1920년대 10만 원의 매출을 자랑하는 김홍조건재약방이 있었다. 약방의 주인 김홍조는 김홍조건재약방을 1941년에 자본금 19만 원의 주식회사 김홍조약방으로 키웠다.

서양의학이 커지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약령시는 더욱 약해져 갔다. 1978년부터 약전골목 상인들은 대구시의 지원을 받아 매년 10월 ‘대구문화 달’ 행사에 맞추어 ‘대구 약령시 부활 축제 행사’를 열었다. 또한 약전골목에 대구약령시전시관[현 한의학박물관]을 건립하여 약재를 거래하기도 하고 옛 약령시의 모습도 재현하였다.

[독립운동의 명소]

1907년 1월 대구광문사 내 문회를 대동광문회로 바꾸는 자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제기된 이래 결성된 금연상채회(禁烟償債會)[또는 단연상채회(斷煙償債會)]는 서문밖 수창사에 ‘국채지원금수합소’를 설치하고, 1907년 2월 21일 서문시장의 한가운데 자리한 북후정(北候亭)에서 군민대회[또는 민회]를 개최하였다. 서문시장 북후정에서 열린 군민대회에서는 금연상채회 회원과 여성을 비롯하여 걸인, 백정, 마부, 채상녀, 주파, 비자, 고용 등 민중들도 기부 행렬에 함께하였다. 의병항쟁이 전국에서 펼쳐질 때 대구에서는 민중이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였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독립운동의 함성이 드높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서문시장이었다. 대구와 경북뿐 아니라 한반도 남부 권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3·1운동이었다. 독립선언서 낭독과 대한독립 만세 삼창을 뒤로한 채 만세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과 군중 700여 명은 서문시장을 나서 곧장 대구경찰서에 다다랐다가 일제 관헌이 경북도청 방면으로의 행진을 막는 터에 방향을 틀어 종로와 주재소를 거쳐 달성군청까지 행진을 계속하였다. 1919년 3월 10일에 3월 8일 시위에 이은 2차 시위가 동문시장에서 펼쳐졌다. 1919년 3월 30일 동화사 지방학림의 젊은 승려들이 군중 2,000여 명이 운집하여 있던 동문시장에서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한 손에는 작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펼쳤다. 그뿐 아니라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3월 10일 동문 시위를 펼친 학생 일부는 비밀결사 혜성단(彗星團)을 조직하여 조선 상인들에게 철시 투쟁과 일본 화폐 사용 금지를 절실히 요망하며, 항일운동을 조직적으로 펼쳤다.

1930년 8월 일제가 합병 기념일 행사를 대대적으로 준비하고 있을 때, 신간회 대구지회 회원, 대구소년동맹 회원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염매시장의 전신주에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를 성토하면서 독립의 정당성을 담은 격문을 붙였다. 1930년 8월 29일 합방 기념일에 벌어진 격문 투쟁은 염매시장을 비롯한 대구 시내 주요 8곳에서 발생하였다.

[해방 후 새롭게 열린 시장]

광복 후 1946년에 북구 칠성동에 북문시장이 생겼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북문시장은 피난민이 몰려들면서 빠르게 커 갔고, 북문시장 인근에는 다양한 시장이 새롭게 형성되었다. 칠성시장은 1980년대 초반 기준으로 북문시장, 경명시장, 작은 칠성시장, 대구 청과시장, 삼성상가, 대성시장, 칠성상가아파트 등 7개를 묶어 서문시장에 버금가는 규모를 가졌다. 칠성시장 자리는 식민지 시대 때부터 북문시장을 중심으로 하여 과일과 채소의 거래가 왕성하였던 곳으로서 주변 농촌에서 생산되는 참외, 수박, 토마토, 오이, 무, 배추, 양파, 감자, 옥수수, 사과 같은 농산물을 전국 곳곳에 공급하였다. 지금은 여기에 더하여 가구, 중고 가전, 주방 기구의 거래도 활발하다.

6·25전쟁은 한국사회에 전환기적 변동과 새로운 풍속도를 양산하였다. 6·25전쟁 뒤에 먼 옛날 대구향교가 있었을 법한 교동에 미군 기지에서 흘러나온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양키시장’이 형성되었다. 양키시장은 1970~1980년대 이후에는 가전제품, 컴퓨터가 대중화되면서 전산업의 중심지로 위치를 굳혔다. 지금은 ‘양키시장’이라는 이름 대신 ‘교동시장’으로 불리면서 옛 명성만큼은 못하여도 군수용품을 찾거나 가전 전자제품 구입과 수리, 컴퓨터 제조와 수리를 하기 위하여 양키시장 또는 교동시장을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대구, 상업도시의 대명사]

조선 후기부터 형성된 대구의 시장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에 부응하며 전국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번성하였다. 대구 시장의 맏형 서문시장, 대구의 2대 시장인 동문시장, 동문시장을 옮기며 얻게 된 남문시장, 대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대구 약령시, 민중의 애환이 서린 신탄시장 등은 식민지 시대 대구의 상권을 지켜 온 곳집들이었다. 또한 대구의 시장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 속에서도 국채보상운동, 3·1운동, 격문 투쟁 등 항일 민족투쟁의 현장이었다. 광복 후 대구에는 시세에 부응하여 칠성시장, 양키시장 같은 새로운 시장이 등장하였다.

이렇듯 대구의 시장은 대구 사회의 주요한 경제적 배경이자 대구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소통의 현장으로서 자기 역할을 충분히 하였다. 대형마트가 등장하고, 온라인 상거래가 대세를 이루는 가운데서도 대구 사람들의 정서와 기억 속에 시장은 잊힐 수 없는 상징과 물상으로 남아 있다. 지금도 대구의 시장은 살아 있는 삶의 현장이며, 행복한 미래를 기대할 수 있는 삶의 곳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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