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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학생, 항일독립운동의 주체로 떠오르다-김일식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026
한자 大邱- 學生, 抗日獨立運動- 主體- 金日植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정의]

일제강점기 대구의 학생운동과 193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인물 김일식.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나고 자라다]

김일식(金一植)[1912. 10. 3.~1953]은 1912년 대구의 남산동에서 분성김씨(盆城金氏) 김영우와 이귀갑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일식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형제와 아버지 형제에게서 항일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김일식은 5살 되던 1917년에 긍석(肯石) 김진만(金鎭萬)[1876. 8. 24.~1933. 11. 20.]·김진우(金鎭瑀) 할아버지 형제가 대구권총사건으로 각각 징역 10년과 12년을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할아버지 김진만은 시서화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김일식은 또 9살이 되던 1921년에 아버지 김영우(金永祐)[1885. 4. 15.~1926. 4. 16.]가 할아버지 형제에 이어 대구형무소에 입감되는 슬픔을 겪었다. 아버지 김영우는 1920년 음력 12월 중국 펑톈[奉天]으로 망명을 떠난 뒤 1921년 6월 29일 경북 경찰부 고등계 형사에 ‘폭탄범’으로 체포되어 「제령 제7호」 위반 및 「총포 취체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입감되었다.

김일식이 12살이 되던 1924년에 할아버지 김진만정운일과 함께 가출옥하고, 아버지 역시 만기출옥하면서 가정에 안정이 찾아오는 듯하였다. 하지만 김일식이 14살 때 아버지 김영우가 감옥 생활의 후유증이 있음에도 1925년 사상단체 정오회, 1926년에는 대구노동공제회에서 사회운동을 벌이다 늑막염을 얻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아버지 김영우의 장례는 1926년 7월 21일 대구 최초의 사회운동단체연합장으로 치러졌다. 1926년은 김일식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다. 김일식이 21살이 되던 1933년에 할아버지 김진만이 사망하였다. 이때 김일식사회과학연구회 등 비밀결사 사건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고 있을 때였기에 슬픔은 더 컸다. 이렇듯 김일식은 항일투쟁의 본보기가 되는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대구고보 비밀결사 구화회에서 활동하다]

김일식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뒤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7년 11월 중순 동급생 박상점(朴相點), 정소수(鄭小秀), 1학년 김성칠(金聖七), 문상우(文祥祐), 황보선(皇甫善) 등과 함께 황보선의 집에서 비밀결사 구화회(丘火會)를 결성하였다. 구화회는 강령으로 지(智)·각(覺)·약(躍)을 채택하였다. 그 뜻은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이를 알고 각성하여 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활약한다’는 것으로서 일종의 ‘맹세’였다. 곧 구화회는 조선의 독립과 독립 이후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였다. 김성칠에 따르면 구화회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온몸을 희생하여 일한다는 뜻이었다. 김일식구화회의 부서인 서무부[책임 황보선], 문화부[책임 김성칠], 재무부[책임 문상우]의 책임을 맡지 않고 일반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격주 토요일마다 자신의 집과 황보선의 집에서 정례회를 열고 공산주의 이론을 연구하고 이를 선전하는 활동을 하였다. 김일식구화회는 1928년 2월 대구고등보통학교적우동맹(赤友同盟)이 결성될 때, 김성칠, 황보선적우동맹에 참여하여 각각 정치부와 출판부 위원을 맡았다. 이후 김성칠에 따르면 구화회적우동맹의 연구반이었던 것 같다. 이 하지만 김일식구화회적우동맹일우당[일명 일우동맹]으로 전환된 한 달 뒤인 1928년 5월 무렵 이탈자가 생겨나면서 조직이 발각될 것을 우려하여 해산하였다.

김일식구화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1928년 신학기 초에 대구고등보통학교 일본인 교사의 이순신 폄하 발언을 계기로 1928년 4월 대구고보폭압정책 반대동맹을 결성하여 동맹휴교 투쟁을 벌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반대동맹을 결성하지 못하고, 여름방학 때를 이용하여 동맹휴교 투쟁을 준비하고 9월 개학과 동시에 동맹휴교 투쟁을 벌이고자 하였다. 이에 김일식을 비롯한 대구고보 2학년과 3학년 학생 200여 명은 1928년 9월 26일 교장에게 학생들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였다. 내용은 학생자치 허용, 조선어 사용과 교내 집회 자유, 조선어 시간 연장과 조선 역사 시간 신설, 교사 배척 등으로 채워져 있었다. 이 요구 조건은 식민지 노예 교육의 철폐와 조선인 본위의 교육 시행 등 정치적 성격의 것이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교장이 학생들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지 않자 곧바로 동맹휴교 투쟁을 벌였다. 이로 인하여 김일식은 1928년 9월 19일 박상점, 정소수 등의 3학년생과 2학년생 김성칠, 황보선 등과 함께 퇴학 처분되었다.

김일식은 1928년 11월 대구고보의 동맹휴학 투쟁으로 인하여 대구고보 비밀결사가 일제에 발각되면서 경찰에 구인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때 일제 경찰은 대구에서 대구고보, 대구공립중학교, 대구농림학교, 교남학교, 계성학교, 대구상업학교 등의 학생 106명을 체포하고, 그 가운데 29명을 재판에 넘겼다. 재판은 1929년 10월 21일 대구지방법원에 열렸다. 김일식은 박상점, 문상우 등과 함께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서울 중동학교에서 2차 학생 만세시위를 일으키다]

김일식대구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1928년 10월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3학년[특과 1학년]으로 입학하였다. 김일식은 1930년 1원 15일 서울에서 서울 시내 중등학교 학생들과 함께 2차 만세시위를 펼쳤다. 이 시위는 3일 동안 계속되었다. 김일식은 시위에 참여한 다른 학생들과 함께 붙잡혀 29일의 구류처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입감되었다. 그런데 1930년 2월 10일 구류처분을 받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가출옥되어 서대문형무소를 나설 때 김일식은 중동학교 학생 이원우, 김무일, 박한배 등과 함께 형무소를 나서지 못하였다. 김일식은 구류 만기일인 1930년 2월 13일에 3명과 함께 출옥하였다. 하지만 출옥도 잠시 김일식 일행은 다시 경찰에 붙잡혀 종로경찰서로 이동하였다. 김일식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때 구화회에 같이 활동하다 퇴학당하고 중동학교에 입학한 박상점과 함께 구속 기소되었다. 무슨 일이었을까. 김일식은 6차 고려공산청년회의 별동 기관으로 조직된 학생전위동맹의 중동학교 야체이카의 구성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야체이카의 책임자는 이원우였다. 김일식은 2차 만세 시위로 인하여 1930년 6월 중동학교 4학년에서 퇴학 처분을 받은 적은 있었다.

[일본 쿄토 유학후 1930년대 대구 학생운동을 이끌다]

김일식은 2차 학생 만세 사건으로 중동학교를 그만두고 1930년 9월 일본 교토[京都]에 유학하여 성봉(聖奉)중학교 4학년에 입학하였다. 김일식은 성봉중학교에서 대구 출신으로 5학년에 재학 중인 김석구를 만났다. 김석구김일식과 같이 대구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1929년 7월 ‘대구 학생 사건’에 연루되어 4학년 재학 중 퇴학당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김일식은 1931년 2월 또 다시 퇴학 처분을 받고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귀국길에 올랐다.

김일식은 1931년 6월말 대구 교외 공동묘지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출신 이경석, 김석구계성학교 출신 염필수 등과 함께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고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목적으로 비밀결사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염필수는 동지사중학교, 이경석은 풍산중학교를 거쳐 양양중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들 모두는 일본 교토 유학을 한 공통점이 있었다. 김일식은 1931년 7월 대구고등보통학교 출신의 한순, 1931년 8월 곽수범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시켰다. 곽수범은 1928년 10월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하던 중 동맹휴학으로 퇴학당하고, 1929년 교토의 성봉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29년에 퇴학당한 경험이 있었다. 사회과학연구회는 연구회 내에 김석구, 한순, 이삼문, 이경석 등으로 구성되는 제1클럽과 김일식, 염필수, 곽수범 등으로 구성되는 제2클럽을 설치하였다. 사회과학연구회는 1931년 7월 「범태평양노동조합 일본좌익노동운동에 대한 결의」를 윤독하면서 사회과학연구회의 진로와 전망을 모색하였다.

김일식사회과학연구회이경석과 함께 1931년 7월 초 대구 교외 공동묘지에서 이동우, 이재우, 백춘갑, 조홍기 등을 만나 대구 지역 학생의 공산주의화를 위하여 ‘학생대표자회’를 조직하였다. 학생대표자회는 대구 지역을 학생을 대상으로 사회주의를 연구하게 하여 혁명 의식을 갖게 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혁명 투사를 양성할 목적이었다. 김일식이경석은 1920년대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비밀결사 운동을 경험한 바 있는 사회과학연구회의 구성원이었다. 이재우대구고등보통학교 출신이고, 이동우대구상업학교 재학생이자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 회원이며, 백춘갑교남학교 출신이고, 조홍기(趙鴻基)는 계성학교 재학생이었다. 학생대표회는 대구 지역 학생운동을 일원화·체계화할 목적으로 학생운동의 역량을 고도화할 수 있는 운동 전술 연구와 개발에 집중하였다.

김일식은 1931년 8월 김홍직, 이우(李雨)[이명 이치용] 등과 함께 경북 지역의 공산주의화를 위하여 ‘전위조직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전위조직준비위원회는 대구 지역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을 지도할 지도기관으로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전위조직준비위원회의 조직은 서기 김일식, 조직부 책임 김홍식, 서무부 책임 이우, 선전부 책임 곽수범 등으로 구성되었다. 김홍직은 김해 출신의 사회운동가이고, 이우는 경주 출신으로 신간회 대구지회의 회원이었다.

김일식은 1931년 11월 하순 이경석, 김홍직과 함께 이삼문전명석을 만나 대구 지역 노동자의 공산주의화를 위하여 ‘적색노동조합건설 대구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적색노동조합건설 대구협의회사회과학연구회와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경북조직의 연대로 이루어진 비밀결사로서, 대구 지역 노동자를 대상으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함양하고,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을 정치투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적색노동조합건설대구협의회김일식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학생부·공장부·관공서부·노동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적색노동조합건설대구협의회는 대구의 공장 현황을 조사하고, 곽수범의 제안으로 ‘제3서방’을 운영하면서 사회과학 서적을 확보하고, 구성원들의 연락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적색노동조합건설대구협의회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의 책임비서 권대형의 지도를 받으면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의회의 하부조직으로서도 기능하였다.

김일식프로과학연구소 제1지국의 반전 격문투쟁이 일제 경찰에 발각된 것을 계기로 그간의 비밀결사 운동이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일식은 1932년 12월 2일에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선고받았다. 김일식은 재판 중 일본어 대신 우리 말로 의사를 표현하고, 주소지도 자신의 집이 아닌 대구형무소로 답변하며 일제의 사법 절차에 저항하였다. 김일식은 1934년 「칙령 제19호」에 의하여 징역 2년 1월 12일로 감형되었다.

[세계제일의 기쁨 속에 김일식, 광복후 10월항쟁으로 재판을 받다]

김일식의 어머니는 광복이 되자 ‘세계 제일의 기쁨’이라며 감격의 눈물을 쏟았다. 광복 후 김일식조선공산당 대구시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김일식은 1946년 2월 28일 대구공회당에서 열린 순절의사추도회에서 유족대표로 인사말을 하였다. 김일식은 1946년 6월 조선공산당 대구시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좌우익 연합의 대구공동위원회 구성에 일조하였다. 김일식10월항쟁에 연루된 혐의를 받고 1946년 10월 3일 윤장혁, 최문식 등과 함께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일식은 1947년 8월 2일 대구지방심리원 제4호 법정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다. 김일식은 재판 과정에서 “일제시대 왜정에 협력하여 조선 사람을 구박하는 사람이 오늘날 우리들을 구형하려 함은 어찌된 일인가? 고로 검찰관은 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요구한다”는 발언으로 재판의 부당성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10월항쟁의 정당한 역사적 맥락과 사회개혁을 요구한 역사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김일식의 학생운동의 특징과 의의]

김일식은 항일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나고 자라나 자신도 학생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펼침으로써 3대에 걸친 독립운동가를 이루었다. 김일식의 항일운동은 대구 지역 학생운동의 노선과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대표적 사례였다. 게다가 김일식과 집안의 독립운동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흐름과 특징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본보기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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